추석만 다가오면 ‘3농’(농업·농촌·농민)이 생각난다. 고질병이다. 필자에게 농업의 본질적 가치인 ‘다원적(multifunctional) 기능’의 소중함을 처음 일깨워준 이는 우연찮게도 외국인이다. 16년 전 파리 근교에서 취재차 만난 당시 프랑스농업경영자총연맹 회장 뤼크 귀요 씨다. 턱수염이 수북한 그는 한국의 낯선 기자를 보자 다짜고짜 “오면서 황금 들판을 봤느냐”고 물었다. 이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농민의 땀과 눈물이 밴 들녘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세상은 삭막해지고 범죄는 득실댈 게다. 자연 경관은 세상을 순화시킨다. 농업의 존재 이유다.”
그런 농업이 한국에선 불에 탄 소가죽처럼 쪼그라들고 있다. 통계를 보면 ‘한국 농업이 망하고 있다’는 한 농경제학자의 탄식이 실감 난다. 총인구 대비 농가인구 비율은 고작 6%대다. 국내총생산 대비 부가가치 비중도 2%대다. 도시근로자 대비 농가소득 비율은 60%대다. 예산도 찬밥이다. 내년 예산이 3.7% 늘어난 슈퍼예산이라고 떠들썩하지만 농업예산 증가율은 0.6%에 불과할 뿐이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뼈 빠지게 내조한 조강지처’ 한국 농업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완전 경쟁적인 농업은 늘 가시밭길이다. 수많은 농민은 고만고만한 농산물을 생산한다. 가격이 좋으면 앞다퉈 생산을 늘린다. 모든 농민이 그렇게 하면 이듬해에는 반드시 가격이 폭락하는데도 늘 똑같다. 그래도 우리 농업은 그런대로 잘 버텨왔다. 농민 특유의 뚝심과 정부·국회의 ‘각별한’ 농업 배려가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양대 ‘괴물’이 출몰하면서 한국식 생존법도 한계에 봉착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공고해진 ‘세계화’와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 이후 완성된 ‘완전개방 체제’가 우리 농업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주도의 4차 산업혁명 도래는 노동집약적 농법에 의존해온 한국 농업의 단명을 재촉한다.
대기업의 농업진출 논란이 또 불거졌다. LG그룹이 자회사인 LG CNS를 통해 새만금지역에 대규모 스마트 팜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하면서다. 생산 작물 전량은 수출하고 농민 참여도 허용한다는 통 큰 제안도 했다.
하지만 공방은 도돌이표다. 적잖은 경제학자와 언론은 대기업 자본의 농업 진출은 기술과 유통의 고도화를 통해 농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인다며 대환영이다. 매출 10조 원이 넘는 미국의 몬산토, 중국의 신젠타와 같은 기업농이 글로벌 추세라는 설명도 곁들인다. 반대 논리도 일리는 있다. 농업생산의 규모화·집중화를 불러 다원적 기능의 근간인 소농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게 요체다. 서구 열강들이 남미 등지에서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왔지만 지역민의 식량 사정이나 경제 상황은 더 열악해진 사례도 부연한다.
일대 전환기 앞에 선 한국 농업에 대기업의 농업 진출은 더 이상 논쟁거리로만 그쳐서는 안 될 당면 현안이다. 중립적이고 양식 있는 전문가들의 결론은 이미 한데로 모아졌다. “이제 대기업의 농업진출은 수용해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대기업과 농민 간 힘의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 치열한 공론을 통해 상생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효율성을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공정하고 적합하게 역할을 배분해 양자의 장점을 극대화해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이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전직 고위 농업 관료가 들려준 고백이 문득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농업에도 ‘5적(敵)’이 있다고 했다. 문제가 터지면 농민 눈치만 보며 어영부영하는 정부, 표심에 눈이 멀어 ‘농민 보호’만 외치는 정치권, 농업을 경제 가치로만 환산하는 외눈박이 경제학자, 손에 흙 한 번 묻힌 적 없고 잡풀 하나 뽑아본 적 없는 얼치기 농경제학자, 운동권식 투쟁만 일삼는 농민단체가 그들이다. 이들의 환골탈태 없이는 한국 농업의 미래도 없다고 했다.
박근혜정부는 ‘농업의 6차 산업화’를 농정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본질은 비켜간 채 ‘주변 농정’을 맴돌다 허송세월한다는 비아냥이 나온 지 오래다. 정부 주도의 한국형 스마트 팜 도입도 비닐하우스에 CCTV나 다는 정도의 시늉만 낼 뿐이다. 파란곡절 끝에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어제 공식 임명됐다. 그는 30여 년간 농업정책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 관료다. 그런 그가 겹겹이 쌓인 ‘주류 농정’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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