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0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에서 근무를 시작할 때만 해도 시게미쓰 아키오(重光昭夫)란 이름이 어쩌면 더 익숙했던 한 경영자가 있다. 일본에서 출생했으니 일본어가 더 자유롭고 자연히 한국말은 서툴렀다. 발음이란 게 성인이 되면 고치기 어렵다는 건 누구나 절감한다. 아키오는 그래도 이를 악문 치열한 노력 끝에 짧은 시간 내에 한국어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최근 재계 관계자가 전해준, 재계 서열 5위인 롯데그룹을 이끌고 있는 신동빈 회장의 ‘한국 정착 분투기’다.

신 회장은 1750억 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28일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구속 여부가 결정된다. 롯데그룹 비리의 정점인 만큼 구속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검찰과 달리, 재계와 법조계에선 오너 일가의 횡령·일감 몰아주기 혐의가 부친인 신격호 총괄회장이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했을 때 진행된 것인 만큼 과연 신 회장이 이를 모두 떠안는 게 타당하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게 일고 있다.

신 회장이 지난 26년간 한국 롯데 경영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베일에 가려 있던 롯데의 지배구조를 투명화하려 노력한 점, 3조5000억 원의 상장자금을 시드머니 삼아 40조 원의 매출 증대 효과를 봤을 정도로 빼어난 경영 수완을 발휘한 점 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재계는 신 회장의 신병이 얽매일 경우 경영권 분쟁에 따른 혼란도 일파만파로 다시 커져 재계 전체에 부정적 파급효과를 안길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일본 기업’ 이미지와 고리를 차단할 호텔롯데 상장이 불발에 그치는 것은 물론, 경영권을 상실해 일본 주주의 지배력이 커지면 롯데의 일본 회사화(化)가 진행될 수도 있다.

그동안 황제식 경영방식으로 쌓여온 롯데의 적폐를 해소하려고 애써온 신 회장에게 오히려 모든 형사적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일까. 롯데 개혁에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보여온 신 회장은 최근 임원들에게 “이번 검찰 수사로 드러난 문제점들을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 회장에게 뼈를 깎는 각오로 한국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경제계 안팎의 목소리가 엄중하게 들린다.

이민종 경제산업부 기자 horiz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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