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배 서울대 교수·지리학

일본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22명째 배출했다는 소식에 우리 사회가 깊은 반성과 선망으로 술렁이고 있다. 한 저녁 뉴스 진행자는 ‘무엇보다 속상하는 일’이라고까지 했다. 견실한 기초과학이야말로 국가의 긴 장래를 보증하는 자원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노벨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분야지만, 필자 역시 기초학문 분야를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초과학계의 감내하기 힘든 연구 환경을 웬만큼 이해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기초과학은 노벨상 수상자를 기대하기에는 그 역사가 너무 짧다. 분야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생물학과 같은 실험실 연구가 필요한 분야는 1980년대 후반부터 연구 실적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기초과학이 원천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확보된 성숙한 학문 생태계가 마련돼야 한다. 올해 생리의학상 수상자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학 명예교수의 희소한 연구 주제, 물리학상 마이클 코스털리츠 교수가 자평한 완전 무지하게 들리는 젊은 패기의 도전적 주제를 수용할 수 있는 성숙한 학문 생태계는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최근 우리의 과학정책은 단기간에 가시적 사회·경제적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현란한 명칭의 대형 국책과제로 몰아가고 있다.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연구(research)보다는 기존의 착상을 가져다가 개선하거나 환경에 맞춰나가는 각색(refinement)이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진정한 연구를 질식시킬 수 있기 때문에 20여 년의 짧은 기간이나마 축적해온 기초과학의 토대를 뒤흔든다.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100명에 가까운 과학자가 참여한 청원서에는 당장 추진할 수 있는 대책이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 예컨대, 자율적으로 연구 주제를 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정부와 연구자가 협의해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거버넌스, 양질의 과학기술 일자리를 마련해 연구력이 꾸준하게 축적될 수 있는 환경 등은 생존을 위한 절규다.

장기적이고 자발성에 기초한 풀뿌리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공무원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단기적 성과가 어려운 경우에는 기초과학 담당 부서가 예산 확보의 정당성을 마련할 수 없고, 집행의 투명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사업 집행에 대한 자신감을 갖기도 어렵다. 현실을 고려하면 기초과학 진흥 문화가 착근되기까지 최고 권력자가 이 부분에 대한 강력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지금처럼 매년 수행되는 성과평가보다는 연구 주제에 적절한 기간의 과정평가로 대체할 때 기초연구의 장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초과학의 발전은 몇몇 조건의 개선으로 시급히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학문의 목적이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있었고, 아직도 그러한 인식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 종국적으로는 기초과학의 영재가 풍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과학적 상상력을 펼쳐나갈 수 있는 여건과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이제는 기초과학의 발전을 장기간의 관심과 투자로 형성되는 사회자본으로, 경제와 사회·문화 등 생활양식의 총체적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기초과학 발전을 염원하는 깊은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곳곳에서 접하면서, 이것이 오히려 과학 대한민국의 길을 재촉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강력한 자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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