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 2016년 日 노벨상 과학자 22명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고토 히데키 지음, 허태성 옮김 / 부키
노벨상 시즌이다. 지난 3일 노벨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13일까지 수상자 발표가 이어진다. 올해 생리의학상의 영예는 일본의 오스미 요시노리(大隅良典) 도쿄(東京)공업대 명예교수가 차지했다. 세포 내 불필요한 단백질을 재활용하는 ‘자가포식’ 현상 연구로 질병 치료의 길을 한층 넓힌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로써 일본은 3년 연속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과학기술 강국으로서의 높은 위상을 재확인했다. 2014년 아마노 히로시(天野浩) 교수 등 3명이 물리학상을 받았고 2015년 오무라 사토시(大村智) 특별명예교수가 생리의학상, 가지타 다카아키(梶田隆章) 교수가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수는 총 25명(미국 국적 취득자 2명 포함)으로 늘어났다. 이 중 22명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나왔다. 아시아에서는 단연 최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에 이어 5위다. 반면 한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게 유일하다. 과학 분야 수상자는 광복 이후 70년이 지나도록 ‘제로’다.
국내 반도체와 휴대전화, 자동차가 세계를 누비고 있고 의료 서비스가 선진국 못지않게 발달했는데도 유독 노벨상 앞에서만큼은 한국이 한없이 작아진다. 왜일까. 그리고 도대체 일본은 어떻게 노벨상 강국이 됐을까.
책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노벨상 1호 과학자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1949년 수상)를 동경했던 저자는 1854년 일본의 개국부터 2012년 야마나카 신야(山中伸彌) 교토(京都)대 교수가 16번째로 노벨상을 받기까지 약 150년간의 ‘일본 과학발전사’를 과학자들의 숨겨진 에피소드에 근거해 서술하고 있다. 우리에겐 낯선 과학자들이지만 이들의 노력이 노벨상의 바탕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 저명한 일본 과학자의 이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메이지(明治)시대 계몽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郞), 아드레날린을 발견한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高峰讓吉), 일본의 고질병이었던 각기병 치료제를 개발한 스즈키 우메타로(鈴木梅太郞), 그리고 유카와를 시작으로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郞·1965년),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2002년), 고바야시 마코토(小林誠·2008년) 등 노벨상 수상자들이다.
일본은 시기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빠르게 서양의 과학지식을 흡수했는데 이 시발점이 된 인물이 후쿠자와다. 후쿠자와는 에도(江戶)시대 바쿠후(幕府)의 봉건체제를 걷어내고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선각자다. 그 자신이 1860년 미국으로 건너가 서양과학을 배웠고, 메이지유신 때 ‘훈몽궁리도해(訓蒙窮理圖解)’라는 일본 최초의 물리학 입문서를 출간해 국민을 계몽했다.
이런 노력이 20세기 초를 전후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본 최초의 세균학자 기타사토는 1885년 독일 유학 후 1886년 파상풍균을 순수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병이 세균 때문에 발생한다는 기초 병리학에도 무지했던 당시로선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 공로로 기타사토는 1901년 1회 노벨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다카미네는 1890년 미국 유학 후 1900년 무렵 아드레날린을 발견했다. 지금이야 영화 제목으로까지 쓰일 정도로 흔한 호르몬의 이름이지만 당시로선 기초 과학의 쾌거였다.
도쿄대 농학부 출신인 스즈키는 당시 일본에 만연했던 각기병을 몰아낸 주인공이다. 그는 수많은 임상시험 끝에 각기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물질을 추출해내고 ‘오리자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비타민 B1인 셈이다. 그러나 스즈키는 의사가 아니었고, 비타민의 존재도 알려지지 않은 때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영국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홉킨스와 네덜란드의 병리학자 크리스티안 에이크만이 비타민을 발견해 노벨상을 받은 건 그로부터 19년 뒤인 1929년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통한다. 일본 1만 엔권의 지폐 인물로서 일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17년 다카미네 등이 출범시킨 이화학연구소는 이후 100년간 일본의 기초 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가 연구원으로 활약했고, 그의 제자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도 연구소와 관계를 맺었다.
중성미자 천문학의 창시자인 고시바는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도쿄대 재학 시절엔 동급생 중에 수학 성적이 가장 뒤졌지만 실험에는 탁월했다. 그는 이 재능을 살려 미국 뉴욕 로체스터대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폐광이었던 가미오카(神岡) 광산의 지하 1000m 아래에서 ‘가미오칸데’라는 중성미자 축출 장치를 만들어냈다.
이렇듯 천재 혹은 괴짜 같은 과학자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일본에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첫째는 적극적인 근대화와 과학기술 육성 정책이었다. 일본은 1854년 미국 군함의 위세에 눌려 개국했지만 다른 어떤 국가보다 서양문물 흡수에 능동적이었다. 패전 후에는 자체적인 기초 과학 육성에 힘썼다. 1995년 과학기술법 제정으로 튼튼한 기반도 확보했다.
둘째는 ‘한우물’을 파는 일본 특유의 문화에 있었다. ‘오타쿠(御宅)’로 대변되는 장인정신은 특정 분야에 몰입해 성과를 내는 풍토를 만들었다.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연구자들은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것에도 호기심을 갖고 매달렸다.
마지막으로 일본 과학계는 폐쇄성을 극복하고 활발하게 교류했다. 일본 최고 대학으로 평가받는 도쿄대 등 특정 대학이 인재나 연구 지원을 독점하지 않고 자유롭게 경쟁한 것도 과학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