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교수로 근무하다 보니 원하지 않게 자기소개서나 학위논문 계획서 같은 학생들의 글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많은 학생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표현한 과잉 개념의 단순 나열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게 뻔한 이런저런 활동을 늘어놓거나, 일반 학생들의 역량을 훨씬 넘어선 거창한 주제를 자기가 다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진지한 태도와 노력보다는 말이 앞선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되어 국정을 이끌어보겠다는 대선 예비주자들이 국민에게 내보인 계획서는 어떤가. 앞서 언급한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나 논문 계획서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뚜렷한 목표와 비전 아래 준비해 온 자신의 역량 설명과 기존 공동체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계획은 보이지 않고, 공정성장론·국민성장론·동반성장론 등 중요성이 과장된 설익은 개념으로 자신의 중요성을 뻥튀기하는 초보자들의 허세가 느껴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먼저, 이러한 개념들은 그 연원이 불분명하고 의미가 모호하다. 공정한 발전(just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이 경제개발학에서 논의가 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분배를 반영한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나 분배동반성장(shared growth)이라는 정치경제학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대선 예비주자들의 공정성장론·국민성장론·동반성장론은 이러한 담론에서 이름만 빌려왔을 뿐 토론된 내용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충분한 학습이 없어 기존 논의가 담고 있는 고민도 없이 의미가 불분명한 개념만 늘어놓는 게 아닌가 싶다.
더 큰 문제는, 경제 성장이라는 동태적이고 경제적인 메커니즘과 정의와 공정성, 분배와 포용성이라는 사회적인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공정성장론·국민성장론·동반성장론은 사실상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조건에서 성장과 사회적인 가치가 상승효과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정부는 어떤 정책을 펼 수 있는가, 우리나라 관료제가 가지고 있는 역량과 한계를 고려할 때 어떤 역할을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구체적인 논의는 없이 ‘나는 알아, 이거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 하는 신입생 같은 허세만 부리고 있는 것이다.
대선 예비주자들이 이제까지 보여준 경제정책에 대한 이력을 고려할 때 이러한 우려는 더 커진다. 우리나라 경제의 건전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노동개혁·공공개혁·산업구조개혁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해온 입장에서 성장은 어떻게 이룰 것인가. 구조개혁 이외에 성장을 이끌어낼 대안을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이제 구조개혁정책에 대한 입장이 바뀐 것인가. 어려운 문제는 감추고 대충 넘어가자는 게 아니라면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건전한 경제 성장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치의 조화에 대해 충분한 토의와 고민 없이 그럴듯한 개념의 나열만 할 경우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 성장의 엔진이라는 분명한 입장에 근거한 성장담론과 이를 지지하면서도 보완하는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하는 ‘국가운용 계획서’는 낙제점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국민은 지금까지 이런 계획서를 너무 많이 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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