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준 논설위원

지난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일에 김정은은 예상과 달리 핵·미사일 도발을 하긴커녕, 공개석상에 모습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나름 전략적 계산에 따른 것이겠지만, 무엇보다도 한반도로 급파된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號)로 대변되는 미국의 무력시위에 겁먹은 것이 주(主)원인의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으로 달려온 미국의 핵심 전략자산은 항공모함과 같은 하드파워만이 아니었다. 인권(人權)이란 소프트파워도 적극 동원됐다.

서맨사 파워 주(駐)유엔 미국대사가 8∼11일 방한했다. 그러잖아도 유엔본부에서 활동하는 미국 대사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데, 그의 행보는 남달랐다. 그는 판문점을 방문하고, 탈북자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했다. 10일에는 서초구에 있는 한 탈북자 대안학교를 방문, 자신의 트위터에 “정치범 수용소에 갇힐 위험을 감수하고 탈북한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간호사, 엔지니어,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메시지와 더불어 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이번 파워 대사의 방한이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그가 단순히 미국 고위직 인사여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권탄압 저격수’로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파워 대사는 직업 외교관 출신이 아니다.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지옥으로부터의 문제점(A Problem From Hell)’(2002년)이란 저서 덕분이다. 1970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9세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1993∼1996년 유고내전에서 현장 취재 기자로 일했다. 그곳에서 ‘지옥’을 체험한 그에게 인권이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 실존의 문제였으며, 또 국제질서 및 국가의 물리력과 깊게 연관된 것이었다. 이 고민의 결과가 그의 저서로 표출됐으며, 이 책은 곧 국제분쟁 및 세계 인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가 됐다. 유엔대사 자리에 오른 것도 이 책과 그의 국제인권 활동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책은 자신이 사는 곳을 ‘헬(지옥)’이라 저주하면서, 막상 ‘진짜 지옥’을 응징하려고 하면 불똥이 잘못 튀어 자신이 지옥으로 여기는 삶이 파괴될까 전전긍긍하는 위선적 비겁함이 존재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이를 통해 진짜 지옥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