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설립자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손자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이 지난 12일 언더우드 사망 100주년 기념식을 맞아 연세대를 방문, 언더우드관 앞을 걷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연세대 설립자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손자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이 지난 12일 언더우드 사망 100주년 기념식을 맞아 연세대를 방문, 언더우드관 앞을 걷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연세대를 설립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고종황제가 그에게 하사한 사인참사검.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이 지난 11일 이 보검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연세대 제공
연세대를 설립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고종황제가 그에게 하사한 사인참사검.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이 지난 11일 이 보검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연세대 제공
‘언더우드 100주기’ 맞아 訪韓한 손자 리처드 언더우드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현 인천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언더우드는 후에 ‘원두우’라는 한국 이름까지 갖고 1915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설립해 우리나라 대학 교육의 선구자가 됐다. 연희전문학교의 재단법인 인가(1917년 4월 7일)를 6개월가량 앞둔 1916년 10월 12일 세상을 떴다. 그리고 언더우드 사망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그의 손자인 리처드 언더우드(89·한국명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은 고종황제가 할아버지에게 하사한 보검을 연세대에 기증함으로써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 사랑을 이어갔다. 연세대가 주최한 언더우드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원득한 전 교장을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서머셋팰리스서울호텔에서 만났다.

원 전 교장은 사실 할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1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들었거나 할아버지 저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게 전부다.

“부끄럽지만 미국에서는 사망일을 별로 의미 있게 보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100주년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고 유창한 한국어로 말문을 연 그는 인터뷰 내내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특히 조선 왕실(이후 대한제국 황실)과의 인연을 소개할 때는 눈빛에 자부심이 넘쳐났다. 원 전 교장의 할머니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는 조선을 찾은 최초의 서양 여의사였다. 할머니는 1888년 입국해 제중원 부인과에 근무하면서 왕비(명성황후)의 주치의를 맡았다. 이전에 왕비에게는 전담 의사가 없었다. 당시 남성은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여성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는데, 왕이 아니고서야 왕비보다 높은 계급의 남성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에 미국 선교부에 여의사를 요청했고, 그에 따라 조선에 온 게 원 전 교장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명성황후와 ‘친구’가 됐다. 결혼할 때는 고종황제 부부가 온갖 선물을 보내왔다. 명성황후가 직접 수놓은 12쪽 병풍, 고려 도자기, 엽전 등을 말 여러 마리에 실어 보냈다. 원 전 교장의 할아버지도 고종황제와 가까워져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원 전 교장은 “왜놈들(그의 표현이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후로는 할아버지가 총까지 챙겨 들고 고종황제 곁을 지킨 적이 많다”며 “독살을 걱정한 고종황제를 위해 할아버지가 집에서 음식을 한 뒤 자물쇠가 달린 상자에 담아 경복궁으로 보내면 열쇠를 갖고 있는 고종황제가 직접 상자를 열어 잡수시면서 한동안 살았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이번에 연세대에 기증한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도 고종황제의 선물이었다. 원 전 교장은 ‘가보’로 남길 수 있는 보검을 기증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 “제가 (언더우드 가문) 3대인데 4대, 5대로 내려가면 아무래도 한국과의 연계가 점점 희미해지지 않겠느냐”며 “집에 두는 것보다 대중이 볼 수 있는 곳에 기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엔 미국 박물관에 둘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사람들이 유품을 보며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곳은 연세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언더우드 가문의 중요한 교육 철학은 자신들이 ‘선진국’ 출신이라고 해서 한국인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오히려 한국인을 마음 깊이 존경했다.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박사가 미국에서 대학교를 마친 뒤 한국에 돌아오기 싫어하자, “내가 학비를 대서 너를 키웠으니, 최소한 3년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며 아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일부러 한 양반 집안에 들여보내 6개월 동안 영어는 아예 쓰지 않고 한국어와 한자를 배우게 했다. 한국인들이 비록 못사는 사람이 많지만 잠재력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뛰어나다고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란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원한경 박사도 한국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품게 됐다. 자신도 자식들을 북한산성, 남한산성, 경북 경주 등으로 데리고 다니며 “옛날 한국 사람들이 이뤄 놓은 걸 봐라. 얼마나 뛰어난 민족이냐”라고 가르쳤다.

원한경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을 지냈는데, 광복 후 학교에서 다시 교장을 맡아 달라고 하자 거절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일본 사람이 지배하던 시절 한국인이 교장을 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잡혀가고 징역을 살 수도 있지만, 미국인인 나는 일본인들이 건드릴 수 없으니까 내가 교장을 맡았던 것”이라며 “한국인의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선 당연히 한국인이 교육을 책임지는 게 맞다”고 교장직을 사양했다.

한국 및 한국인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레 원득한 전 교장에게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태어난 원 전 교장은 15세 때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1942년 미국으로 들어갔다. 미국에서 고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는데, 광복 이후 한국으로 배치됐다. 한국과의 인연이 ‘운명’이라고 생각한 그는 미국에 돌아갔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 재입대했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한국으로 복귀했다. 함흥, 원산, 흥남 등지에서 포로 심문을 담당했고, 휴전회담이 시작될 때는 문산에 배치돼 통역을 맡았다.

특히 북한에 머물며 ‘스파이’ 역할까지 해본 경험은 한국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됐다. 1947년 원 전 교장은 하사관으로 평양에서 3개월을 보냈다. 당시 서울에는 구소련의 연락장교가 여러 명 있었고, 평양에는 미군 연락장교 2명이 있었는데 원 전 교장은 표면적으로 연락장교 차량을 운전하는 역할로 북한에 들어갔다. ‘운전병’ 신분을 활용, 원 전 교장은 차량을 일부러 고장 내 수리공장을 찾아가 북한 사람들을 만났고, 이렇게 쌓은 친분을 통해 서류나 사진 등을 넘겨받아 서울로 보냈다. 그는 “그때 김일성까지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엔 김일성이 계급이 높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가 열심히 외쳐대면 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원 전 교장이 군인 시절부터 한국인을 존중했던 일화 한 토막. 한 번은 서울 시내 좁은 길에서 자전거를 탄 한국인이 빨리 비켜주지 않는다고 미군이 밀어버린 적이 있었다. 바로 뒤에서 이 모습을 목격했던 원 전 교장은 즉시 상부에 보고해 해당 미군이 징계를 받게 했다. 원 전 교장은 “평양에 있을 때 내가 탄 차량이 다가가자 북한 아주머니가 논두렁으로 뛰어들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소련군은 길가에 한국인이 걸어가면 차로 치어서 논에 빠지게 하니까 차라리 먼저 뛰어드는 게 낫다’고 하더라”며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저질렀던 소련군보다는 낫겠지만, 미군이라도 한국인을 깔보는 듯한 행동을 할 때는 분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원 전 교장은 제대 후 ‘직업’을 한국에서만 가졌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다.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출발, 1961년 교장에 오른 후 1992년까지 자리를 지키고 은퇴했다. 중간에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에 돌아가 1970년 럿거스대에서 교육행정학 석사를 따고 온 것을 제외하면 줄곧 한국에서 생활했다. 1970년대에는 연세대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이 서울외국인학교 쪽으로 진입하자 경찰 책임자를 따로 만나 학교에서 경찰을 몰아내고 연세대 학생들까지 지켜낸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시위하는 캠퍼스에 직접 들어가기 부담스러우니 우리 학교를 캠퍼스 진입에 이용하는 모양인데 그럼 우리도 시위를 하면 경찰을 철수시키겠느냐”는 게 그의 설득 논리였다. 직접 한국 학생들을 가르친 적은 없지만, 원 전 교장은 한국식 교육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조언을 했다. 그는 “교육현장을 떠난 지 24년이 돼 현재의 한국 학교 교육을 전혀 모른다”며 “다만 과거에 한국 학교는 외우는 것을 더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그걸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미국식 교육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로는 미국에 돌아가 살고 있지만, 원 전 교장은 한국 생활의 추억을 항상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원 전 교장은 4∼5년에 한 번씩 한국 땅을 밟는다. 자신이 몸담았던 서울외국인학교 행사, 할아버지와 관련된 연세대 행사 등에 맞춰 오기도 했지만, 그냥 문득 한국에 오고 싶어 찾아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 서울 시내에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한국 언론의 기사까지 미국에서 챙겨 봤다고 할 정도다. 원 전 교장은 “대개 선교사들이 연세대 오른쪽에 모여 살았는데, 아버지는 반대편에 집을 지어서 나는 오히려 연희리(현 연희동)에 사는 한국 아이들과 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며 “논밭에 얼음이 얼면 아이들끼리 썰매를 타던 것, 남사당패 놀이를 즐겨 봤던 추억, 여성들의 그네 타는 모습에 반했던 기억, 한국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실력임에도 열심히 제기를 찼던 경험 등이 불과 얼마 전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원 전 교장은 “이제는 나도 늙어서 몸이 약해지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알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가는 게 슬프다”며 “그래도 이번에 입국 다음 날(10일) 30여 년 동안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함께 근무했던 직원 25명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한 게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며 아련한 미소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성훈 기자 tar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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