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교 정치부 차장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 취임사는 명연설이다. 1801년 3월 4일, 그는 민주주의 작동원리를 간결하게 요약했다. ‘다수 의사가 모든 경우에 존중되어 소수 의견에 우선해야 하지만, 이치에 맞고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소수 의사는 법이 보호하는 동등한 권리를 가집니다. 이 같은 원리를 어기면 억압이요, 압박이 될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제퍼슨의 취임사를 다시 펼쳤다.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이 감수·교열했다는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과는 달랐다. 철학이 있고, 학문이 풍기고, 사상이 묻어난다. 건국의 아버지인 제퍼슨은 미국의 구조를 세웠다.

1일 오후 1시 40분,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오늘 설문조사 기사 정확한 겁니까. 여론 오도하지 마세요.” 30대 여성의 목소리에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완전보수 박근혜 지지자구나. 박 대통령 하야·탄핵 48.2%에 항의하는가 보다’. “조사는 전문기관에서 진행했고요. 결과 그대로 보도한 겁니다.” 오판이었다. “아니, 내각교체 뒤 박 대통령 중심 국정 정상화 응답이 어떻게 22.5%나 나오냐고요. 말이 됩니까.” 그는 5분여 동안 국민적 배신감을 쏟아냈다. 처음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는 그에게 연신 “이해합니다”라고 말한 후에야 통화가 끝났다.

이날 12시 15분, 오랜만에 지인 K 씨와 점심을 들었다. 방위산업 연관업체 임원인 그와 최순실 비리는 ‘석기시대 사건’이라고 공감했다. 그런데, 사실과 의혹, 인식의 오류에 관한 문제점도 제기됐다. K 씨는 “어느 신문인가, 최가 무기 브로커 린다 김을 만났고, 한국의 F-35A 전투기 도입에 손을 뻗친 의혹이 있다는 기사가 나왔던데, 그건 아니지. 제작사 록히드마틴항공은 내가 알기로는 에이전시나 브로커를 고용하지 않아요. 글로벌 전체에서 모두 동일한 원칙을 유지합니다.”

다시 이날 오후 2시 30분, 좌담회를 진행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홍순경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3명이 참석했다. 기획 시리즈 ‘탈북민 3만명 시대’를 마감하는 자리였다. 북한에서 홍 위원은 외교관, 허 위원장은 벌목공으로 일했다. 최순실 사건에 대해 물어봤다. 홍 위원은 “애국 세력은 빛이 안 나고, 이익 집단만 있는 것 같다. 박 대통령은 탈북민들이 바라는 대통령이다. 처벌도 하고 사과도 해야겠지만, 정권 흔들기는 옳지 않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구조가 허물어지고 있다. 뇌물로 얼룩진 판결문이 써지고, 금품이 묻은 영장이 청구되는 세상이다. 사실과 의혹의 혼재로 사상 최악, 전대미문으로 번져간 최순실 사건을 형해화하면 본질은 같다. 판단을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사교(邪敎) 얘기는 꺼내고 싶지도 않다. 권력을 위해 뭉치고, 아첨을 떨고, 대가를 챙기는 측근 비리다. 역대 대통령 모두 마찬가지였다. 주변에는 침묵의 카르텔이라는 공범집단이 존재했고, 권력자는 판단력을 상실해 갔다. 최순실 사건은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닐 것이다. 국가의 구조를 다시 세우지 못하면 언제든 뱀처럼 고개를 든다. 제퍼슨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취임사를 정리한다. “여러분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언제든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용의가 있습니다.”

jklee@munhwa.com
이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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