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후 신임 정무직 임명장 수여식이 열린 청와대 충무실로 입장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자신을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이자 피의자로 전환한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해 정치권에 사실상 탄핵소추를 요구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탄핵 절차를 통해 유무죄 판단을 가리자는 것이지만 대통령직 지속 여부에 대한 판단을 정치권과 헌법재판소에 떠넘기는 동시에 국면전환을 염두에 두고 사태 장기화를 노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검찰 수사의 중립성·객관성을 문제 삼으며 강한 유감을 표한 뒤 “차라리 헌법상·법률상 대통령의 책임 유무를 명확하게 가릴 수 있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하루빨리 이 논란이 매듭지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 대변인은 ‘합법적 절차’의 구체적 뜻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그대로 이해해달라”며 밝히지 않았지만 이는 ‘헌법상·법률상 대통령의 책임 유무’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탄핵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박 대통령이 탄핵을 요구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탄핵절차를 통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혐의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다는 점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 대변인도 “대통령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받을 헌법상의 논리는 박탈당한 채 부당한 정치적 공세에 노출되고, 인격살인에 가까운 유죄의 단정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검찰이 박 대통령에 대한 직접 조사도 없이 일방적으로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론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고, 재판도 열릴 수 없어 유무죄를 가릴 수 없다는 점을 억울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날 검찰은 헌법 제84조에 규정된 현직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 때문에 기소할 수 없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만일 검찰이 시한부 기소중지 카드를 꺼내든다면 박 대통령이 퇴임한 후에 기소가 가능하다.
【서울=뉴시스】최순실 게이트 특별수사본부 이영렬 본부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검찰 중간수사 결과 발표하는 모습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한 전광판에 생중계 되고 있는 뒤로 청와대가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법원 판결도 거치지 않은 박 대통령의 ‘범죄 사실에 대한 의심(혐의)’은 국민 정서상 확증으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크다. 이에 따라 국회와 헌재가 대통령의 위법행위를 판단하는 절차가 있는 탄핵으로 가자는 게 청와대의 입장이지만 진짜 속내는 사태 장기화를 염두에 둔 것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탄핵소추안은 국회에서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최장 6개월이 걸리고 이에 앞서 국회의 탄핵안 논의와 발의 과정까지 감안하면 길게는 8개월까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탄핵 정국이 길어질수록 박 대통령으로서는 지지층 결집이나 여론 반전을 모색할 시간을 그만큼 벌 수 있다.
청와대가 “대통령은 야당이 추천한 특별검사의 수사까지도 아무 조건 없이 수용했으며 앞으로 진행될 특별검사의 수사에 적극 협조해서 본인의 무고함을 밝히겠다는 입장”이라며 검찰의 직접 조사를 거부하고, 특검 조사에만 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사태 장기화 포석의 일환이라는 분석이다.
특검은 준비기간 20일에 본조사 70일, 그리고 1회에 한해 30일 연장할 수 있어 120일까지 걸릴 수 있다. 박 대통령 측에 최장 4개월 가량의 시간을 벌어다 줄 수도 있는 셈이다.
특히 사태가 탄핵·특검 정국으로 장기화되는 가운데 박 대통령이 국정을 재개, 정국을 여야 대립이나 진보 대(對) 보수의 대결 양상으로 끌고 가는 이슈들에 계속 동력을 불어넣는다면 보수층이 다시 뭉칠 수 있고, 자연스레 임기를 끝까지 마칠 수 있는 추동력도 생긴다는 관측이다.
박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태에도 불구하고 여야 간 대립이 첨예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 등을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도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정 대변인도 이날 “박 대통령은 앞으로도 국정에 소홀함이 생겨나지 않도록 겸허한 자세로 모든 노력 다할 것”이라고 말해 박 대통령이 피고인 신분 전환과는 무관하게 국정 재개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탄핵 정국으로 사태가 장기화에 접어들면 국면을 전환할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커진다. 이를테면 야권에 불리한 의혹 같은 것이다.
여당 뿐만 아니라 야당 정치인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부산 엘시티(LCT) 비리 사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 엄단을 지시한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국회 부결이나 헌재 기각 가능성도 결코 적지 않다. 이 경우 박 대통령으로서는 검찰이 적시한 혐의점에 면죄부를 얻는 셈이 된다.
탄핵소추안은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 발의와 재적 3분의 2(200명) 이상 찬성으로 의결되기 때문에 새누리당 의원들이 최소 29명 이상 동조해야 한다. 만일 탄핵안이 국회에서 부결된다면 정치적으로 무죄가 선고되는 것이 될 수 있다.
헌법 제65조는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해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혐의만으로 법률 위반 조건에 해당하는 것인지 논란의 여지도 있다.
이에 더해 탄핵은 국회 가결 후에도 9명의 헌법재판관 가운데 6명의 찬성이 필요한데 박한철 헌재소장은 내년 1월에, 이정미 헌법재판관은 내년 3월에 임기가 끝난다. 박 헌재소장과 이 재판관의 후임은 각각 대통령, 대법원장 추천 몫인데 국회 동의나 임명 과정에서 이들 자리가 공석으로 이어질 경우 남은 7명 중 2명만 반대해도 탄핵안은 기각된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일단 시간을 끌면 그만큼 반격의 기회가 생길 여지가 커진다는 점을 계산하고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버티기’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