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그대사’‘고백’등
1㎞ 길 따라 52개 장면 그려
주말엔 수백명 방문객 다녀가
낙후된 주택가와 웹툰의 결합은 겉보기에 뭔가 조화롭지도 가능하지도 않아 보인다. 고상한 그림 대신 우스꽝스러운 만화 캐릭터들이 거리를 수놓고 있는 장면도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이 현실이 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곳이 있다.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 1072길 일대에 유명 웹툰작가 강풀의 작품 속 명장면들로 조성된 ‘강풀만화거리’다.
강풀 만화거리는 40년간 강동구에 거주해 온 강풀 작가의 협조 아래, 강동구청이 지난 2013년 1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강풀의 작품 ‘순정만화’ ‘바보’ ‘당신의 모든 순간’ ‘그대를 사랑합니다’ 속의 명장면을 지역 주민과 자원봉사자, 미술 작가 등과 함께 마을 곳곳에 그려 넣어 조성했다.
지난 15일 지하철 5호선 강동역 4번 출구로 나와 천호동 방향으로 300m 직진하다 만화거리임을 알리는 조형물과 함께 좁은 골목이 보였다. 멀리선 노후 주택이 모인 마을로 들어서는 길 같았지만, 실제 들어서자 예상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골목 입구에 첫 번째로 보이는 주택에 그려진 작품 ‘나들이 왔어요?’가 반겼다. 이어 대각선 맞은편 직사각형 모양의 벽에 다양한 색감으로 표현된 ‘당신의 모든 순간’이 그려진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청춘남녀들이 으레 경험했을 사랑 고백의 순간을 표현한 ‘고백’이 있었다. 바닥의 노란 별을 따라 굽이굽이 뻗어있는 1㎞의 길을 따라가며 총 52점의 만화 속 장면을 감상하다 보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잘 보이고 싶어요’의 한 장면과 같이 있는 ‘추억이 흐르는 이발소’도 만화거리를 빛내는 요소 중 하나다. 38년 이용사 경력의 김영오(70) 씨가 이발소 전면 유리에 “20대 청춘으로 돌려드리겠다”는 말풍선과 함께 ‘그대를 사랑합니다’ 속 한 장면을 옮겨놨다. 이발소 내부엔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일제강점기 군인들이 사용하던 수통, 당시 이용되던 이발기와 가위 등 이발 도구, 1960년대 학교에서 쓰이던 교과서, 타자기 등 평소 보기 힘든 것들이다. LP 음반에선 1970∼1980년대 추억의 가요들이 흘러나온다. 입소문이 나면서 주말엔 수백 명의 외부 방문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내년 1월엔 주민과 관광객들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만화책을 볼 수 있는 특화 커뮤니티 공간 ‘승룡이네’가 문을 연다. 1층엔 응접실과 카페가, 2층엔 1만3000여 권의 만화책이 구비된 만화도서관이 들어선다. 3층은 만화 작가들이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며, 4층엔 작은 텃밭을 조성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승룡이네’가 완공되면 앞으로 강풀 만화거리는 만화 속 장면만 보고 떠나는 곳이 아닌 만화의 제작과 감상, 관련 모임까지 가능한 ‘만화 허브’ 거리로 발돋움하게 된다.
강동구는 전문 해설사와 동행하는 ‘벽화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화예약을 통해 상시 투어가 가능하며 사람들이 몰리는 토요일엔 정기투어가 진행된다. 또 방문객들이 출출함을 달랠 수 있도록 만화거리 입구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주꾸미 요리업소 밀집 지역을 지난 8월 ‘주꾸미 특화골목’으로 깔끔하게 정비했다.
한상복 강동구 디자인기획팀장은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 만화와 벽화를 매개로 소통하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만화거리 탄생으로 결실을 봤다”며 “만화거리를 성내전통시장, 주꾸미 거리와 연계해 서울의 대표적 명소로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노기섭 기자 mac4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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