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 前 국무총리

헌정(憲政) 위기 사태를 맞고 있는 지금의 정치 상황은, 책임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지옥이고 이를 바라보는 식자(識者)들에게는 천국이다. 없는 문제가 없는 정치백화점이기 때문이다. 나와 있는 해결 방안들도 쇼핑몰의 상품들 같다.

무엇을 고를 것인가? 광장의 정서로만 본다면, 속 시원하게 단칼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는 힘들다. 그런 유혹의 종착은 어둠의 골짜기에 이르기 일쑤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해결이란 하나의 문제를 개혁을 통하거나 협상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 것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불완전한 속성이 개입될 소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은, 권력이 과두적(寡頭的)으로 집중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선동정치(demagogic politics)가 판을 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지금 사태에서 여지없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비판하는 것은 좋으나, 대안으로 다른 체제를 염두에 둔다면 정치 개혁의 소지는 소멸된다.

여기까지는 이론이다. 이제 현실적인 드라마를 보자. 지금 필요한 개혁을 문제 삼는다면, 민주화 이후에 야기된 문제들을 다시 점검하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의 문제가 제대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현재라는 위치가 역사적 범주 속에 자리매김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문제는 독재시대의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고 민주화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30년 동안의 모든 정권이 권력의 오용과 남용의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그 스캔들은 여태껏 지금 사건처럼 파헤쳐지지 못하고 넘어갔다. 범주적으로 보자면, 각기 사건의 특수성은 있다 치더라도 그리 유별난 사건으로 보기도 어렵다. 돈의 액수도 그렇고 정보 유출도 그렇다. 이번 사태를 파헤칠 특별검사팀이 곧 뜬다고 하니 기대는 해보겠지만 믿을 건 못 된다. 시민사회의 정치적 몫이 이제 작동해야 할 때가 됐다. 그것으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막론하고 총체적 불신에 휩싸인 민주적 대의(代議)제도를 살려야 한다.

광장의 열정을 나무랄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열정은 대통령 하야에만 집중돼 있어서 어차피 소수에게 권력이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이성을 되찾아가야 한다. 북한 인권에 대해 북한에 물어보고 처리한 세력,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두고 중국에 물어보고 처리해야 한다는 세력,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합의한 장관을 단죄하겠다는 세력, 북핵(北核)을 민족적 핵이라고 여기는 세력 등 민주공화국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을 진보라고 하는 세력에 정권을 넘겨주고 자식들의 밝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지 물어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위기는 대통령의 권력 오·남용 문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안보위기와 경제위기가 겹쳐 있다. 그 위기들의 상당 부분이 대통령의 정책 판단 오류에 기인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통치 기능은 대통령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의회도 분명한 통치기관이다. 그런데도 국회(國會)는 그 기능을 포기하고 ‘통치 파업’을 벌인 지 오래다. 대통령이 만든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은 통치 포기와 책임 회피의 더할 수 없는 도구임에도 고칠 생각조차 않고 있다. 두 쪽으로 쪼개 놓은 정부 기관들의 분포도 대통령이 만든 것이다. 그 문제를 알면서도 왜 이를 돌려놓을 노력도 하지 않았는가.

예산을 통제하는 주머니 권력을 가진 국회가 언제 한 번 결산을 제대로 해 본 일이 있는가. 그러면서 ‘쪽지 예산’이라는 일종의 세금 도둑질에 대해 무슨 소리를 내 봤는가.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가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의사당 구조 때문이긴 하지만, 보좌관이 써 주는 원고를 떠나서 제대로 된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의원은 몇이나 되는가.

총체적 정치 위기다. 위기는 그러나 뒤집으면 기회다. 지금은 역사(歷史)를 한 단계 올려놓을 기회다. 위기 없이 기회는 오질 않는다. 이를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통치자의 몫이다. 문제가 있으면 답도 있는 법이다. 다만, 판단하는 데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같이 사고의 일대 전회(轉回)가 필수적이다. 통치자에게는 이 전회를 위한 밑거름이 돼 줄 각오가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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