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2월 3일은 6·25 이후 최대 국난 또는 ‘제2 경술국치’로 불린 ‘환란(換亂)일’이다. 19년 전인 1997년 이날 당시 임창열 경제 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자금지원안, 즉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해 1월 시작된 한보그룹 계열사 22개의 연쇄 부도와 거래 은행·종금사 등 61개 금융기관들의 부실화가 전조(前兆)였으나 누구도 민간의 위기가 정부의 위기로 확대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시 IMF와 협상 타결로 진정될 것 같았던 금융시장은 더 위기로 치달았다. 공황 상태였다. 외국계 자본들이 남들보다 빨리 자금을 회수하려 나섰다. 이를 멈추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두 가지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 일본, 유럽 은행들의 자금회수를 막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 시기에 백악관으로 전해진 세 번째 통화였는데, 한마디로 빚쟁이가 들이닥치는 걸 막아달라는 굴욕적인 읍소(泣訴)였다.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이튿날 데이비드 립턴 미 재무부 차관보를 만나 “새 정부는 IMF와의 협상 결과를 준수하겠다”고 약속했다. 후보 시절엔 재협상론을 주장했으나 당선 후엔 “내가 파악했던 것보다 경제가 훨씬 나쁘더라.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바뀌었다.
이 신호들이 로버트 루빈 미 재무부 장관을 움직였다. 뉴욕 월가와 유럽의 주요 재무장관들에게 한국에서 자금 인출을 자제하고 만기를 연장해주도록 요청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12월 24일, 단기외채의 ‘코리아 엑소더스’가 멈췄다. 김대중정부 초대 경제사령탑이었던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최근 출간된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서’에서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국제사회의 협조를 끌어낸 것”이라고 했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단기적으론 통계 착시 현상, 시장의 불확실성에 대한 정부의 졸속 대응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게 국가의 대외신인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을 안이하게 생각했다. 신용등급은 나쁘지 않았다. 연평균 8%의 고도성장이 지속됐고, 물가도 안정 추세였다. 주요 품목들의 수출 경쟁력 악화로 경상수지 적자가 급격히 늘고, 외채 가운데 절반이 넘도록 단기외채가 늘어난 걸 놓친 게 컸다. 1996년 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선진국이 된다”면서 도입한 자본시장 자유화 조치가 부메랑이 됐다. 정부는 한국경제가 글로벌 체제에 편입되는 엄청난 변화와 속도를 거의 눈치채지 못했고, 거시 지표만을 되뇌었다. 정책이 오락가락했고, 제도 개혁은 대통령선거에 휩쓸려 국회에서 무산돼버렸다.
작금의 한국경제가 ‘더 큰 위기’라고 한다면 반박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역대 최상의 국가 신용등급에다 세계 7위(3751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유지하고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1997년과 달리 세계 경제가 장기정체 상태다. 한국도 2012년 이후 2014년(3.3%)을 제외한 나머지 3년간 모두 2%대 성장에 그쳤다. 올해엔 최악이 예상되고, 내년은 더 어렵다는 전망이 다수다. 경제 규모를 지속 성장시킬 경제 체질을 바꾸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시적 위기(crisis)보다 장기 저성장의 ‘침체(recession) 공포’가 더 무섭다.
하지만 청와대나 국회는 경제에 대해선 오불관언(吾不關焉 )이다. 경제 컨트롤타워 공백이 이어지는 데도 내팽개치고 반(反)기업 입법에 열을 올리고 있다. 다음 주 청문회에는 기업 총수들부터 불러냈다. 세계 200여 개국에서 사활을 건 경쟁을 하는데, 국내에서 마치 ‘범죄 기업’처럼 취급하면 글로벌 경쟁력은 자해(自害) 수준도 넘어설 것이다. 검찰은 대통령의 제3자 뇌물죄 입증을 위해 되레 기업 수사 고삐를 당기고 있다. 국정 농단의 본질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사적(私的) 기업 갈취다. 그런데 대통령 조사 대신 만만한 기업을 향해 화풀이하듯 ‘네 죄를 알렷다’식으로 압박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드러난 대통령의 기업 겁박만으로도 넌더리가 날 지경인데, 정(政)·검(檢)까지 합세하는 형국이다. 정치의 위기에도 국가가 굴러가는 건 경제 토대가 튼실할 때다. 그게 선진사회로 가는 진정한 힘이다. 권력으로 민간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한, 외환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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