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순실로 대표되는 일군(一群)의 국정농단 및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사회, 노동, 시민단체에서부터 지성의 집단이라는 대학까지 수많은 시국선언·성명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우국(憂國)’의 메시지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띈 단체가 하나 있다. 지난달 17일 소장 회계사 372명이 내놓은 시국선언문이다. 1987년 4·13 호헌조치나, 6·29선언 등 나름 현대사 격동의 과정을 지켜봤지만, 전문단체 가운데 회계사의 시국선언은 약간 생경하다 싶었다. 선언에 참여한 청년회계사회 회장도 “이재(理財)에 밝고 이런(정치적인) 일에 무관심했던 과거를 생각해 보면 372명이란 숫자가 시국선언에 참여한 변호사 3000명, 변리사 1000명보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은 인원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게이트 과정에서 헌법상의 경제원리를 파괴하고 ‘경제 독재’를 자행했다고 지적했다.
방식을 떠나 퇴진 또는 탄핵으로 귀결되어 가는 이번 게이트가 미증유(未曾有)인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장경제 질서의 철저한 훼손, 분탕질이다. 우선은 2개 재단에 강압성 기부 출연을 요구해 내로라하는 대한민국 간판 기업들의 경영시스템에 혼란과 불안감, 유착 논란까지 초래했다. 와중에 최순실-차은택-송성각 라인은 모의를 통해 아무 죄도 없는 회사를 넘기라며, 정당한 사유 없이는 할 수 없는 세무조사를 운운(강제성을 띤 세무사찰)하며 겁박했다. 심지어 ‘묻어버리겠다’고까지 했다. 날강도나 다름없다.
대통령의 뜻이라고 진술했다는데,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재계 순위 14위인 CJ그룹 측에 이미경 부회장이 물러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압박했다. 견디다 못한 이 부회장은 ‘망명’했다. 권력의 비위를 거스른 ‘괘씸죄’가 비단 공직뿐 아니라 경제주체의 핵심인 기업에까지 전방위로 작용했다. 맘에 드는 수하들은 대기업에 마구 꽂아 넣었다. 기업의 꽃인 임원에 정상적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빨라야 20년 이상이 걸린다. 창조경제를 앞세워 이들에게 시장과 기업은 ‘놀이터’ ‘장난감’이었다. 시장경제의 작동원리와 시스템, 경쟁구조의 역동성은 안중에도 없었고 관심사항도 아니었다. 중요성을 알 리도 없고 사리사욕만 채우면 그뿐이었다. 실력과 노력이 어우러진 자유경쟁이 물 흐르듯 해야 잡음이 없는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행태가 횡행했으니 경제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자본시장경제에 탐욕으로 가득 찬 토비(討匪)가 설쳐댄 꼴이다. 기업, 가계는 얼어붙어 있고 외환, 글로벌 금융위기의 재발 우려에 대한 공포감이 시장 전체에 엄습해 있는데도, 책임감 있게 위기상황을 돌파해 나갈 컨트롤타워는커녕 속수무책, 무장해제 상태이다. 경제는 심리라는데 위무적인 발언조차 찾아볼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에 조선군이 없다는 척후의 보고가 믿기지 않아 여러 차례 확인한 후 만세를 부르며 춤을 추고 통과했다는 몇백 년 전의 망령이 되살아날 지경이다.
시장경제를 어지럽힌 비정상적 행태에 대한 발본색원, 재발 방지 대책과 함께 정치권, 정부가 비상상황에 걸맞은 경제위기 대응 방안을 조속히 강구해야 할 때다. 물은 목까지 차오르고 있다.
hori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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