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정치부 선임기자

우리는 막 시민혁명을 겪었다. 혁명의 본질은 구체제를 해체하고 새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패배한 승리’가 되지 않으려면 그 열기가 국회로 옮아가야 한다. 근현대 역사의 진보는 시민권력과 대의(代議) 권력의 결합으로 성취됐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정치권이 또 하나 해야 할 과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탄핵하는 것, 개헌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주장은 ‘대선 후 개헌론’이다. 시간이 촉박하므로 대선 전 개헌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공약으로 내세운 뒤 당선된 대통령이 개헌도 하고 임기도 줄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YS(김영삼)는 3당 합당의 토대인 ‘내각제 이면합의’를 깼고, DJ(김대중)는 JP(김종필)와의 공동정부 공약인 ‘임기 후반 내각제 개헌’을 파기했다. 권력구조의 변동과 관련된 그 어떤 다짐이나 약속도 집권 후에는 공염불이 됐다는 게 한국 정치사의 증언이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선 후 개헌론’에 대해 “과거 대통령들한테 많이 들었던 얘기지만 다 헛소리”라고 말했다.

특히 일부 유력 대권 후보의 부정적인 입장이 대선 전 개헌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역대 대통령들이 겪은 임기 말 현상을 제도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문 전 대표는 자신의 정치 스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심판을 기다리던 2개월보다 임기 후반 재임 기간이 더 힘들었다”고 토로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관심 사항이라는 이유만으로 국회 처리가 번번이 무산되는 데 대한 낭패감을 털어놨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김병준 교수는 “문 전 대표가 당시 정무 쪽에만 있어서 정책 파트가 안고 있던 고민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 전 대표의 ‘대선 전 개헌 반대’는 대권이 손 앞에 있다고 믿는 지지율 1위의 오만함과 성급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대통령 단임제는 30년 전에는 폭압적 구질서를 무너뜨린 희망의 언어였지만 지금은 극복해야 할 기득권 논리가 됐다. 박 대통령의 실패는 곧 사람의 실패이자 제도의 실패이기도 하다. 역대 대통령을 비극으로 몰고 간 제왕적 대통령제는 이제 끝장내야 한다. 마침 여야 3당이 내년 1월 국회에 개헌특위를 신설하기로 했다. 정치권은 개헌안(案)에 분권, 다양성, 통합, 공존, 협치 같은 시대정신을 담아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뤄내는 것과 함께 대선 전 개헌을 실천하는 게 정말로 중요하다.

1960년의 4·19혁명과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항쟁 등 시민혁명 뒤엔 늘 반동이 따랐다. 정치 지도력 부재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들이었다. 시민 없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가 문제였다. 그게 정치권이 역사에서 배워야 할 이유이고, 더 성숙해야 할 이유이며, 광장의 열기가 대의제로 수렴되어야 할 이유이고, 대선 주자들이 강고한 ‘대선 전 개헌연대’를 꾀해야 할 이유이다. 역사가 반복되는 데도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minski@
허민

허민 전임기자

문화일보 /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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