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 고연희 등 공저 / 다산기획
사임당전 / 정옥자 지음 / 민음사
전국의 여·중고교에 신사임당(1504∼1551) 동상이 없는 곳이 드물다. 오만 원권에도 그녀의 초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근·현대만이 아니고 거의 500년 전부터 사임당만큼 다양하게 이미지가 바뀐 인물도 없다. 물론 변신은 사임당 자신과 상관이 없고, 시대의 필요에 따라 호명되고 만들어졌다. 2009년 오만 원권 지폐의 모델로 사임당이 거론됐을 때 여성계가 크게 반발했다. 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소비하는 데 대한 이 반발은 사임당의 역사적 ‘호명’에 대한 첫 거부였다. 내년 초 이영애 주연의 TV시리즈 ‘사임당, 빛의 일기’ 방영을 앞둔 탓인지, 사임당에 관한 책이 잇따라 나왔다. 고연희 등 5명이 쓴 책이 “그녀를 만들어온 ‘기억과 재생의 역사’”에 주목했다면, 정옥자의 책은 “구체적 존재 사임당의 ‘사실’”을 주로 남겨진 작품을 통해 따라간다.
그녀 생전에 남편(이원수)이 출세한 것도 아니고, 그림을 잘 그렸던 그녀는 당시 ‘신 씨’ 혹은 ‘동양 신 씨’로 불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명칭이 ‘사임당’으로 바뀐다. 그림에 대한 평가도 명칭만큼이나 바뀌고 18세기 회화사까지 변화시켰다는 건 흥미롭다. 율곡의 기록인 ‘선비행장’을 봐도 사임당은 당대 섬세한 필묵법의 고전적 산수화 화가였고, 오늘날 우리가 대표작으로 아는 ‘초충도(草蟲圖)’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많은 고위 사대부들이 사임당의 그림을 수집했지만 산수화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대 노론은 율곡을 태두로 제자 김장생 - 송시열로 이어졌다. 조선을 지키는 길은 주자학의 실현뿐이라 믿었던 송시열은 공자 - 주자 - 율곡을 추숭하는 과정에서 신사임당의 작품 역시 유교적으로 해석했다. 스님이 등장하는 신사임당의 산수화를 위작으로 부정했다.
이런 해석은 오랫동안 초충도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됐고 18세기 회화사에서 유독 조선에서만 초충도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송시열은 사임당에게도 유교 질서와 노론의 이데올로기를 덧씌워 율곡의 ‘어머니’에 맞는 이미지를 부여했다. 화가 신사임당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유교적 어머니가 된다.
사임당은 개항 이후 식민지 시기 역사 공간에서 근대교육의 필요함을 역설하는데 자식 교육을 잘한 여성으로 다시 불려 나간다. 특히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서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이름으로 주목받았다. 국민 양성을 목표로 후일 어머니가 될 여성의 교육목표는 현모양처였다. 조선의 전통적 여성관이 열녀효부였다는 점에서 이는 일본이 만든 이데올로기였다. 사임당은 식민지 말기에 ‘군국의 어머니’, 후방에서 전쟁을 돕는 ‘총후부인(銃後婦人)’으로도 동원됐다. 박정희 체제에서는 독재 체제 옹호를 위해 민족주의적 영웅화 작업을 진행하며 사임당은 다시 국가 영웅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만들어진다.
로 사학자인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책은 이 같은 후세에 의한 이미지에 대한 논란은 접고 사임당의 실제 삶 자체에 초점을 둔다. 사임당은 부유한 환경에서 호사 취미로 시·서·화 등 예술을 즐기며 호강한 귀족 여인이 아니라고 저자는 단호히 말한다. “그 결과 그녀의 힘겨웠던 인생살이가 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고, 또 하나의 ‘여자의 일생’이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사임당은 강릉 친정집에서 성장하던 유년 시절이 행복한 시절이었고, 열아홉 살에 한량 남편과 결혼 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고단한 삶의 시작이었다. 사임당은 홀로 집안 살림을 꾸려가면서 홀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돌보고 자녀들을 길렀다. 어려운 형편에 보태기 위해 바느질을 하고 자수를 놓았으며, 사임당의 작품 대다수는 자수를 놓기 전에 먼저 본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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