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종 경제산업부 차장

“기업이 아무리 클린(Clean) 선언을 하고 투명경영, 자정(自淨)하겠다고 결심, 선포하면 뭐합니까. 정부가 손을 벌리며 뒤로 각종 규제와 사정기관을 앞세워 반협박하면 맞설 기업은 하나도 없어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대한 대기업 출연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들은 모 대기업 관계자의 발언은 격앙돼 있었다. 그는 준조세적 성격의 출연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일단 처음부터 2개 재단 출연의 기초 설계 및 원인 제공자가 아님은 수긍, 인지하는 바일 터이다. 이런 맥락에서 떠올려본, 과거 권부(權府)가 주도한 각종 재단을 둘러싼 논란과 잡음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5공(共) 때만 해도 기업들이 ‘새세대육영회’ ‘심장재단’ ‘일해 재단’ 등에 온갖 기부, 출연을 떠맡았다. 기업 자산, 매출액 등으로 출연 규모를 정해준 방식도 변하지 않았다. 출연 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멀쩡했던 기업을 생선 토막 내듯 잘라 해체하며 탄압했다. 거시당국, 국책은행, 사정 당국이 총동원됐다. 본보기로 물고를 냈으니 공포에 질려 버틸 기업이 없었다. 서슬 퍼런 날이 서 있는 세무조사 편의를 미끼로 내건 국세청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어 선거자금 조달에 동원(1997년 ‘세풍 사건(稅風事件’)돼 알토란 같은 돈을 내고 곤욕을 치렀다. “정부가 요구하면 거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는 2016년 대기업 총수들의 토로는 그런 데자뷔, 악몽 때문이 아닐까.

특검은 대기업의 출연이 대가성이 있는 뇌물인지 여부를 규명한다고 한다.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점은 음성적·강압적으로 기업을 대상으로 손을 벌리는 준조세 성격의 기금·출연 요구 잡음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 연구기관장은 “국내 기업의 역할이 정치·사회적으로 다중적(多重的)이다. 투자, 고용뿐 아니라 취약 부문 지원, 정책적 특화 부문까지 협력과 기여를 원하고 있는데 문제가 생기면 되레 어김없이 추궁을 당한다”고 했다. 타의에 의해 떠밀렸는데도, 문책 대상으로 추궁받고 반(反)기업정서가 높아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최순실 사건은 기업 영역이 불편부당한 부담을 느끼고 종국에는 위법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재발 방지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기업의 준조세에 대한 활발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부당한 청탁을 차단하고 기업을 경제 활성화에만 전념하도록 뒷받침하는 한편, 기업 공익 기여에 대한 부분은 객관적·합리적 제도의 틀을 조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권이 바뀌면 또다시 ‘제2의 미르·K스포츠재단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청문회를 열고 수사를 해봐야 뿌리가 바뀌지 않는데 자칫 ‘백년하청(百年河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기업 활력을 북돋워 투자, 고용, 수출을 장려해도 시원치 않을 상황에 구시대의 어두운 프레임에 갇혀 있으니 미로를 어떻게 빠져나올지 아득하다. 내년은 마침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해 가계가 해체됐고, 국가 경제가 마비됐던 환란(換亂) 20주년이다.

horizon@munhwa.com
이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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