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丁酉年 위한 시집 5권
일상에 심드렁한 당신에겐
톡톡 튀는 오은 ‘유에서 유’
굳은 다짐을 해야할땐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좋아
늙었다고 탄식하는 노년엔
김광규 ‘오른손이 아픈 날’
아름다운 서정시 원할땐
박준 ‘당신의 이름…’읽기를
고단하지만 열심히 사는 삶엔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앞’을
소설가 보르헤스는 “책은 우리가 부를 때 잠에서 깨어난다. 우리가 책을 열지 않으면 기하학적 종이 더미에 불과하지만 책을 열면 독자와 만나 미학적 사건을 일으킨다”고 했다. 펼치는 순간, 종이 더미에서 독자에게 말을 거는 마법의 책이 되는 것이다. 새해엔 누구나 한 살 더 먹고 자기 생에서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새로운 시간에 들어서 새롭게 출발한다. 그 출발이 새 학교에 진학하고 취직해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되는 것처럼 가슴 설레는 일일 수도 있지만 노년의 삶이나 은퇴같이 즐거울 수만은 없는 출발도 있다. 다양한 인생의 단계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독자들에게 조언을 안기며 마법의 시간을 열어줄 책들, 소설 그리고 시집을 추천한다.
새해다. 이맘때가 되면 작년까진 연습이었다고,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시작. 멋진 단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다짐하여 다가올 일을 대비하고 맞이하여 멋지게 살면 된다. 끝없는 새로움이야말로 삶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늘 시작 앞에 서 있다. 한 해의 시작, 한 달의 시작, 한 주의 시작, 하루의 시작, 관계의 시작 등등. 작년엔 개인적으로도 참 많은 시작과 함께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시작은 시집 서점을 열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만류했고 그러나 저질러버렸고, 반 년간 어찌어찌 잘 운영해오며 여전히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시(詩). 문학의 언어로 일상을 포착해내는 이 장르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영(0)에 가까우리만치 무용하다.
‘슬프다’라고 적으면 될 것을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말하며, ‘사랑하는 당신을 원한다’고 하면 될 것을 “내 마음은 호수”이니 “그대 노 저어 오”라고 쓴다. 그럼에도 시는 아름답다. 아름답게 울린다. 무용한 시는 그래서 유용하다. 그간 우리는 너무 앞만 보며, 숫자와 이익을 따지며 살아온 게 아닐까. 한 해가 시작된다. 무수한 시작들이 앞에 놓이는 것이다. 시로 시작을 해보면 어떤가. 푸석하기만 한 삶에 시라는 물을 공급해주자. 그리하여 우렁우렁한 열매를 맺는 조금은 다른 삶을 꿈꿔보자. 아래 다섯 권의 시집은 각기 다른 출발선에 놓인 당신을 위해 골라본 것이다. 시집 속 시들이 당신의 멋진 새날을 밝혀줄 것이라고 믿는다.
첫 번째 시집은 새로운 시작 앞에서 그저 심드렁한 당신에게 권한다.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는 반복되는 삶을 새로운 각도로 들여다본다. 시인 오은은 ‘말놀이’를 사용해 ‘뻔’한 것들을 펀(fun)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시인이다. 그는 누구나의 일상에서 ‘즐거운 발견’을 캐내어 우리의 문제를 통렬하게 꼬집는 동시에 그 순간을 사랑하게 만든다. 시종일관 ‘싱싱-톡톡’한 시들을 읽으며 무력에서 벗어나 새 시작에 대한 기대를 품어보자. “일을 망쳐도 저녁을 걸러도/ 약속이 없어도 날씨가 흐려도”(일주일) 시작이니까.
금연, 금주, 합격 등 굳은 각오를 해야 하는 당신에게는 윤동주 시집 ‘별 헤는 밤’(민음사)을 권한다. 영원한 청년 윤동주는 청정하고 섬세한 언어를 사용해 단단한 다짐을 새겨넣는다. 덕분에 그의 시를 읽는 내내 세세한 감정의 일렁임과 두터운 감동의 울림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다. 시 ‘참새’에서는 마당의 참새에게 “하루 종일 글씨 공부를 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 쓰지 못한다며 귀엽게 타박하기도 한다. 이미 윤동주와 그의 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생기 넘치는 한해의 시작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추천은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문학동네)이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스무 살내기 친구들이 읽으면 좋겠다.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이 젊은 시인은 서정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단어는 “미인(美人)”이다. 여기서의 ‘미인’은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뜻한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고 말하는 이 시인은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사는 청춘들의 아름다운 대변자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고되고 지쳤으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시집을 전한다. 이문재의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은 제목만으로 의미 있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바로 여기가 맨 앞, 맨 처음이다. 한순간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없이 깜깜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끝은 곧 시작이지 않을까. 시인은 웅장한 언어로 “거기가 땅의 맨 처음, 땅의 시작이다”(시 ‘땅끝이 땅의 시작이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끝처럼 보일 거기가,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음. 모두에게 주어진 가능성이 아니겠는가.
시작과 어울리는 시집이 비단 이 다섯 권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모든 시집은 나름의 시작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시집들이 당신에게 다짐을, 기쁨을, 즐거움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시를 읽은 당신이 텅 빈 백지 위에 자신만의 언어를 적어가는 시인처럼 새로 받은 2017년을 아름답게 꾸려가길 바란다.
유희경 시인·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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