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원 김홍도(1745∼1806·초상화)는 조선시대 문예 부흥기였던 영조, 정조 시대에 활동했던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다. 김홍도가 연풍 현감으로 발령받게 된 것은 정조의 초상화(어진) 작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김홍도는 정조가 임금이 되기 전부터 정조의 어진을 3점 그렸는데 그 중 연풍 현감으로 발령받기 전에 그린 마지막 어진을 정조는 크게 만족해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직급이 낮았던 무관 출신들로 집안 분위기는 그림과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일찍이 김홍도의 재능을 발견한 형수가 추천을 해 일곱 살 전후에 강세황(1712∼1791)에게 화법을 배웠다. 김홍도는 강세황에게 그림뿐만 아니라 성리학을 배움으로써 훗날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화가가 되는 기초를 쌓았다. 그리고 그의 추천을 받아 도화서 화원이 된다. 그는 도화서에서 ‘경형당수작도’ ‘규장각’ 등 그림으로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최고의 화원으로 인정받는다.
김홍도는 화원으로 밀려드는 주문받을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김홍도의 가장 유명한 풍속화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풍속화첩’으로 씨름, 서당, 춤추는 아이, 빨래터 등 25점의 작품이 모두 서민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김홍도가 사람들의 일상을 실감 나게 표현할 수 있던 것은 뛰어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력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풍속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정조의 후원도 있었다. 정조는 화원들에게 시험문제로 ‘보자마자 웃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다’고 할 정도로 풍속화를 장려했다. 김홍도는 화원으로서 정조의 관심과 애정 덕분에 종6품에까지 오를 정도로 출세했지만 정조가 승하한 후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 그의 말년은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돼 있다. 그러나 인생역정이 어떤 굴곡을 거쳐왔건 김홍도가 풍속화는 물론 산수, 인물, 불화, 화조 등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시와 문장 그리고 거문고 연주 등에도 조예가 있을 정도로 위대한 예술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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