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단원 김홍도와 단양8경
바쁜 일상에 지쳐 심신이 피폐해질 때면 우리는 잠시나마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소망이 하나 있다면 경관이 빼어난 곳에서 자연과 벗 삼아 휴식을 취했으면 한다. 하지만 우리의 바쁜 일상은 인생이 결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지치고 피곤한 일상의 위로가 되는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사진 한 장이다. 사진을 보면서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어서다. 한 장의 사진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처럼 김홍도는 정조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단양의 풍경을 담기 위해 연풍 현감으로 1791년 12월 22일에 부임한다. 김홍도가 연풍에 근무한 기간은 약 3년이지만 주목할 점은 그가 화원 출신이라는 것이다. 조선 오백 년 역사 중 화원이 현감이 된 것은 김홍도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이전에도 김희겸, 변상벽 등이 사천, 곡성 현감을 지낸 바가 있어 정조의 특혜는 아니다. 하지만 기술관이 문무관을 거치지 않고 공직에 따라 중앙과 지방에 관리로 임용될 수 있다는 규정이 법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관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어 그 예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김홍도가 현감으로 발령받게 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김홍도가 발령받은 연풍은 지금의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이르는데 높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작고 아늑한 고을이었다. 연풍에서 조령 삼관문을 넘어서면 경북 문경으로 이어지니 바로 수많은 영남 유생들의 과거 길이었다. 연풍면은 경상도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지만 아주 외지고 작은 마을로 지금까지도 ‘울면서 오고 울면서 가는 연풍 원님’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첩첩산중의 고을 연풍으로 부임하는 현감들은 과거에 합격은 했으되 장원급제는 못해 간신히 지방에 벼슬자리를 얻어 내려오는 이들이었다. 그래도 현감으로 내려오면서 드디어 관리가 돼 팔자가 피나보다 생각했지만 부임해 사방을 둘러보니 산과 시내밖에 없는 고을이라 나오는 것이 한숨이요, 눈물밖에 없다며 부임 행차에 신세를 한탄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연풍은 보기와 달리 먹고 입을 것이 풍부했고, 민심은 검소하면서 순수했다. 백성들이 송이버섯, 잣 등 철마다 정표로 현감에게 가져오는 물건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산해진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으니 옆 마을의 문경 현감과 술 한잔하며 문경새재의 절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풍을 떠날 때는 발걸음이 무겁고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고 했던 고장이다.
한진호의 ‘도담행정기’ 가운데 ‘사인암별기’를 보면 김홍도의 연풍 현감 부임은 본 업무였던 어람용 그림 제작과 관련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인암별기에는 ‘세상에서 일컫기를 단양의 경승으로 다섯 바위가 있다고 하니, 삼선암의 세 바위,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과 운암 그리고 사인암을 이른 것이다. 이제 사인암을 보니 참으로 진기한 경관이다. 일찍이 듣자니 주상 정조께서 그림 잘하는 이 김홍도를 연풍 현감으로 삼아, 그를 시켜 그곳에 가서 영춘, 단양, 청풍, 제천의 사군산수를 그려 돌아오게 하였다. 김홍도가 사인암에 이르러 그 뜻을 얻지 못하더니, 십여 일 머물러 가면서 익히 보고 노심초사하였는데도 끝내 참모습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인암은 김홍도의 필력으로도 그리기 힘들었을 정도로 절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조가 김홍도에게 연풍 현감 자리를 내준 이유였다. 즉 정조는 제2의 외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경인 단양을 자유롭게 화폭에 담아 오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바람처럼 김홍도는 현감으로 부임한 후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처지가 되지 못한다. 연풍에 3년 내내 큰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했다. 고을 수령으로 연풍 근처에 있는 조령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제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김홍도는 고을 수령으로 기근 구제와 보고서 작성으로 정신이 없었다. 김홍도는 기근 구제에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주변에 있는 절경을 그리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김홍도는 나이 마흔여덟 살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걱정이 많았다. 그는 그 일대에 있는 상암사에서 기우제를 지내면서 자식을 얻게 해달라는 소원도 함께 빌었다고 한다. 결국 지극한 정성 때문인지 귀한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가 바로 김홍도에 이어 화원으로 활동한 김양기다. 그 이후 김홍도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됐다. 말년에 그는 스님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연풍에서 김홍도는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얻어 나름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795년 기근 때문에 파견된 위유사 홍대협이 정조에게, 연풍 현감 김홍도가 부하를 등치며 사냥을 빌미 삼아 세금을 거두어 백성을 혹독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고해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그해에 김홍도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한양으로 압송돼 온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11일 만에 사면한다.
한양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1796년 정조를 위해 단양 팔경의 절경을 그린 ‘단원 절세보첩’을 완성한다. 절세보첩 중 김홍도의 필력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옥순봉’이다. 단양 팔경 중 4경 옥순봉은 충북 제천시 수산면에 있는 기암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로 퇴계 선생이 1543년 청풍군에 일이 있어 배를 타고 오다가 희고 푸른 여러 개의 봉우리가 마치 대나무 싹과 같다고 하여 그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강어귀 가장 높은 봉우리가 중앙에 있고 왼쪽에 있는 산은 비스듬히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 원경에 있는 산은 구름에 반쯤 가려 있다. 하단에는 차양을 앉은 배가 떠 있는데 배 안에는 선비 두 사람이 있다.
왼쪽의 산과 오른쪽 원경의 산은 중앙에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옥순봉을 강조하기 위해 배치했다. 또 김홍도는 옛사람들이 옥순봉을 보고 마치 거인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의식해 옥순봉을 중심으로 중경과 원경에 산봉우리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하단에 차양을 한 배에 앉아 있는 두 선비는 풍류 중 선유를 의미한다.
선유는 대자연과 동화되려는 마음에 배를 띄우고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즉 배를 물 위에 띄웠지만 정해진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노를 젓거나 돛대를 조정하지 않고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송나라 소동파의 적벽 뱃놀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소동파는 정치적 문제로 황주로 좌천돼 가 있던 중, 두 차례에 걸쳐 적벽 아래 강에서 객들과 함께 선유의 풍류를 즐겼다고 하며 그때의 감회를 적은 것이 유명한 ‘전적벽부’와 ‘후적벽부’다.
조선의 선비들은 배를 타고 유람하는 것을 소동파에 적벽선유에 비유했다. 따라서 배에 타고 있는 선비는 물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옥순봉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어귀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의 기법은 겸재가 개발한 방식으로 전통적으로는 겸제준(謙齋준)이라고 부르고 있다. 겸재가 ‘금강산 총석정’을 그리면서 금강산의 뾰족하고 우뚝 솟은 봉우리를 표현하기 위해 수직으로 죽죽 그어 내리는 기법을 선보였는데 후에 그러한 방식은 겸재준이라고 불렀으며 겸재준은 뾰족한 봉우리나 바위산을 묘사하는 데 쓰인다. 한국화는 선의 예술이지만 선을 쓰는 방식에 의해 다양한 기법이 있다.
김홍도의 ‘옥순봉’은 실경산수로 실경산수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실경산수는 자연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흥취 또는 자연의 이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김홍도는 ‘옥순봉’의 실경을 그리면서도 선비들의 모습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치를 그려냄으로써 사실적이면서도 관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을 꼽으라고 한다면 한국화의 특징 중 하나인 여백의 미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화에서 자연의 이치를 드러내는 여백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김홍도는 정조의 뜻을 받들어 자연의 이치보다는 옥순봉의 절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김홍도는 단양 팔경을 보고 싶었지만 바쁜 국정 탓에 갈 수 없는 정조의 눈이 되어 단양 팔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정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선시대 르네상스를 열었던 정조는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었지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일상은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네가 사진에서 위로를 받듯이 김홍도가 그린 단양 팔경의 그림을 통해 자연이 주는 감동을 느끼는 것이었다. 한 장의 사진이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듯이 김홍도의 그림은 정조가 살면서 가장 갖고 싶었던 휴식이었을 것이다.
박희숙(서양화가·미술 칼럼니스트)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