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세게 관운(官運)이 좋은 사람이다. 나라별로 500년에 한 번 돌아오기도 힘들다는 유엔 사무총장을 10년 한 것만 해도 그런데, 이제는 대통령 후보 그룹의 최선두에 서 있다. 스스로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됐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인사들은 탁월한 역량과 엄청난 노력, 훌륭한 품성의 결과라고 얘기한다. 운명론이든, 인과론이든 반 전 총장은 보수 정치세력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무엇이 ‘대선주자 반기문’을 키웠는가. 본인이 나선 적이 없으니, 누군가 도왔을 것이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이 큰 기여를 했다. 민주 국가, 특히 5년 단임 대통령제 국가라면 후계자를 키우는 일도 지도자의 중요한 책무다. 대통령이 빨리 바뀌는 만큼 국정 기조라도 ‘연임’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조건 거부했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닮았다. 이것이 국정농단보다 더 심각한 잘못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의도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반기문에게 대권 고속도로를 닦아 준 셈이 됐다.
다음은, 권력의 온실에 안주하며 굳세게 성장하지 못한 ‘웰빙 여당’이다. 70년 가까운 헌정사에서 보수 정치가 이처럼 무기력한 적은 없었다. 때로는 ‘반민주’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국정 중심세력으로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책임감도, 역량도, 결기도 안 보인다. 탄핵 사태나 촛불 과잉을 개탄하는 집단이 있지만 충정만 넘칠 뿐, 시국의 주류를 형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2012년 실패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여전히 대안(代案)세력으로서 신뢰를 주지 못하는 야당도 반기문을 돕고 있다.
반기문은 이런 정치적 사막 위에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신기루 같은 존재다. 그만큼 위험성도 다분하다. 1970년 2월 외무고시 합격 이후 오늘날까지 47년 동안 오직 외교관의 외길을 걸어왔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희망이 외교관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외교관은 ‘직업’이 아니라 ‘모든 것’이다. 외교는 대통령의 철학을 대리 집행한다는 점에서, 정치와는 크게 다르다. 유엔 사무총장이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리지만, 세계의 조정자에 가깝다. 물론 200여 국 정상이 모두 최고의 정치인들인 만큼, 글로벌 정치는 여의도 정치보다 훨씬 복잡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평생 머리부터 발끝까지 체화된 외교관 체질이 쉽게 바뀔까.
새 정치 여망에 부응하는 일도 쉽지 않다. 친박도, 비박도 무조건 반기문 영입을 외친다. 지금은 권력자 중심으로 뭉쳤던 보수 정치세력이 이념 세력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친박당’을 ‘친반(親潘)당’으로 간판만 바꿀 위험성이 벌써 보인다. 그렇게 되면 국민이 굳이 반기문에게 환호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반기문 현상이 요란해 보이지만 아직은 막연한 기대감 위에 존재하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다음의 두 분야에서 능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거품으로 끝날 것이다. 우선, ‘초불확실성(hyper-uncertainty)의 시대’를 돌파할 비전과 역량이다. 촛불 여론을 넘어서야 한다. 여론은 민심의 지도(地圖)다. 그 지도를 토대로 최상의 목적지로 대한민국호를 이끌 것이라는 신뢰를 줘야 한다. 혼란스러울수록 기본과 원칙이 중요하다. 한·미 동맹으로 안보를 확고히 하면서, 북핵과 통일 문제를 해결할 ‘실현 가능한’ 방안을 제시해 국민 신뢰를 얻어야 한다.
다음으로 통합과 소통, 양극화의 극복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다양한 세력과 인재들로 ‘무지개 드림팀’을 짤 능력이 필요하다. 정치 신인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 해방 외에는 철학도, 배경도, 스타일도 판이한 경쟁자들을 모두 끌어들여 ‘라이벌들의 팀(Team of Rivals)’을 구성했고, 150년 이상 이어진 공화당의 토대를 닦았다. 배신과 갈등만 키울 것이라며 주변에서 반대했지만 ‘텐트 밖에서 안쪽으로 소변을 보게 하는 것보다, 안에서 밖으로 향하게 하는 게 낫다’는 논리로 물리쳤다. 지금 현실에 비춰보면 반기문을 중심으로 김무성 총리, 정몽준 외교부 장관, 손학규 통일부 장관, 정운찬 기획재정부 장관, 안철수 교육부 장관, 김문수 행정자치부 장관, 유승민 보건복지부 장관 식의 팀이다. 이런 팀을 꾸리고,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유엔 사무총장 경험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반기문의 운명은 귀국 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한 달이면 가닥이 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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