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곧바로 좋아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인천 부평구 부평동에 있는 한 족발집. 15평(49.6㎡) 남짓한 가게에서 만난 ‘미스터 람바다’ 박광덕(45) 씨는 오후 장사를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씨름 스타였던 박 씨가 족발에 입문한 지는 7년. 박 씨는 “몇백만 원, 몇천만 원을 벌다가 몇만 원 버는 삶으로 바뀌었지만 지금이 좋다”며 “지금 누리는 행복을 조금 더 알차고 단단하게 꾸미고 싶다”고 말했다.
박 씨는 1990년 씨름판에 데뷔하자마자 엉덩이를 흔드는 람바다 춤으로 인기를 누렸다. 박 씨를 보기 위해 2000∼3000명의 관중이 몰렸다. 박 씨는 “사람들이 열광해주니까 기분이 얼마나 좋았겠냐”며 “경기에서 져도 ‘람바다’를 외치는 관중들 때문에 람바다를 춘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인기를 기반으로 박 씨는 1995년 12월 방송에 진출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카메라 울렁증으로 방송 적응에 실패했다. 박 씨는 “방송의 언어나 문화를 전혀 몰랐다”며 “게다가 카메라 앞에만 서면 대사 한 줄을 제대로 말하지 못해 크게 혼났다”고 말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씨름으로 복귀했지만 과거의 기량은 회복하지 못했다. 폭식과 폭음에 익숙했던 박 씨의 몸무게가 운동을 쉬는 동안 40㎏ 가까이 불어 198㎏에 육박했다. 백두장사 3회 우승, 천하장사 5회 준우승을 차지한 씨름 선수 박광덕은 없었고, 사실상 홍보용으로 전락했다. 은퇴 2년 후인 2002년에는 결국 심근경색 수술까지 받았다.
쉽게 번 돈은 또 쉽게 빠져나갔다. 박 씨는 “방송에 출연하면서 행사비 같은 게 괜찮았고, 사업도 하고 있어서 수십억 원은 벌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주변에는 돈을 보고 사람들이 모였다. 박 씨는 “당시는 사람 잃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며 “부탁을 받으면 거절할 줄 몰랐고,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돈을 꾸어서라도 돈을 빌려줬다”고 말했다.
크고 작은 사업에 투자해 손해를 봤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박 씨는 “쌓인 빚이 10억 원이 넘어 나중엔 주머니에 1000원 한 장이 없었고, 라면 하나를 끓여 먹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씨름에 복귀한 후에 월급의 절반이 압류당하는 경험도 했다. 그는 “돈을 잃었다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고, 죽어야겠다는 생각도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처가 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10년은 더 살아보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박 씨는 “떡심보다 질긴 게 사람 목숨이고, 파리 목숨보다 짧은 것도 사람 목숨이라고 어르신들이 말하지 않나. 삶이 바로 좋아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살아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열심히 일했다.
박 씨는 “2005년 빚을 모두 갚고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며 “여러 사업을 한 뒤에 족발에 정착했고, 직접 주방에 들어가 고기도 삶고 손님들도 상대하면서 내 사업에 대한 자부심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2010년부터 착실히 닦아온 족발 매장은 현재 전국에 7개가 있다. 박 씨는 “큰 매장은 아니지만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며 “요즘 참 어려운 시기지만, 손님들이 내가 삶은 족발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을 보면 기쁘다”고 말했다.
박 씨는 “예전에 돈 많이 벌던 때가 그립지 않다거나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정말 행복하다”며 “일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가 16개월 된 딸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내와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할 때면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인천=전현진 기자 jjin23@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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