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장만 모아놓은 책이라니. 책을 보는 순간, 아이디어가 탐났다. 책을 쓸 것도 아니면서. 그만큼 아이디어가 빛났다.
이런 아이디어를 김정선이라는 저자가 다뤘다면 재미있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단어의 쓰임과 문장 교정이라는 실용적인 분야에 소소한 이야기를 곁들여 상당한 입소문을 낸 ‘동사의 맛’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의 저자라면 기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상만큼, 그 이상으로 잔잔하게 좋다.
책에는 국내외 소설 242편의 첫 문장과 거기서 뻗어 나간 저자의 단상이 담겨 있다. 톨스토이, 가브리엘 마르케스, 밀란 쿤데라, 오르한 파무크,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그리고 김훈, 이승우, 신경숙, 김영하 등의 고전, 명작, 대표작, 듬성듬성 낯선 작품까지, 242편의 첫 문장들이 모였다.
그가 “첫 문장을 모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안구건조증 때문이었다. 20년 넘게 교정 교열 전문가로 일해온 그는 3년 전 안구건조증으로 1년가량 일을 쉬어야 했다. 도서관 서가에 기대 소설을 꺼내 읽어도 두 쪽 이상 읽기 어려웠다. 그때 그는 첫 문장만이라도 써두면 소설을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기록을 시작했다. 그 1년 동안 ‘동사의 맛’을 썼고, ‘동사의 맛’ 교정지를 주고받으며 편집자가 더 써보고 싶은 책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당연히 위대한 작가들이 고심 끝에 만들어낸 첫 문장들을 만나는 것이다. 작품 전체의 상징이든, 사건의 암시든, 그저 시작하기 위한 묘사든 첫 문장의 아우라는 대단하다. 게다가 작품 전체와 떨어져 나와 있는 첫 문장들은 우리에게 화두처럼 던져진다. 저자는 여기서 출발해 아주 간혹 소설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첫 문장에 담긴 키워드들, 단어들, 뉘앙스들, 예를 들어 삶, 죽음, 사랑, 기억, 바람, 냄새, 숲, 골목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을 풀어낸다. 때로 저자 개인의 삶 안쪽의 구체적인 기억을 파고들기도 하고, 직업병을 버리지 못해 문장들을 분해해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단상은 짧지만 결코 얕지 않다. 지식은 폭넓고, 사색은 깊다. 소설이든 인문서이든 최소 세 번 이상 읽어야 하는 직업이 만든 공력과 독서 서평집을 내놨던 저자의 독서 이력이 토대가 됐을 것이다. 그는 관련 전문가들이 비전문가가 소설을 마음대로 다뤘다고 생각할까 두려워 여러 번 책 내기를 포기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전문가라면 으레 갔을 작가·작품 분석 같은 길이 아니라 반갑게도 평범한 우리들도 겪을 만한 일상과 그에 대한 성찰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아이러니하게 첫 문장 책을 낸 뒤 첫 문장에 대한 상징성을 버리게 됐다고 한다. 반드시 첫 문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고, 이야기는 중간에서 불쑥 시작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전엔 종종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면 지금보다 나았을까”를 상상하곤 했지만 첫 문장이 그러하듯 우리 삶에서도 시작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고 했다. 소설의 이야기가 첫 문장에서 시작하지 않듯, 우리 삶의 이야기도 어디에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도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이다. 출판사는 책을 ‘저녁노을’ 같다고 했다. 조용하고, 고즈넉하고, 조금은 애잔하게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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