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 바예스테로스가 1979년 브리티시오픈 4라운드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뒤 18번 홀 그린을 향해 걸어오면서 갤러리를 향해 양팔을 치켜들고 있다.
세베 바예스테로스가 1979년 브리티시오픈 4라운드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뒤 18번 홀 그린을 향해 걸어오면서 갤러리를 향해 양팔을 치켜들고 있다.
‘이방인의 선두주자’ 세베 바예스테로스

1979년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스페인 출신 선수는 수십 년간 미국이 지배해 온 세계 골프의 흐름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1960∼1970년대 미국은 아널드 파머와 잭 니클라우스라는 2명의 걸출한 스타를 배출하며 골프 전성기를 구가했다.

난공불락이던 미국 골프를 침공해 이방인 골프 시대를 연 주인공은 세베 바예스테로스였다.

1979년 7월 18일. 제108회 브리티시오픈이 열린 스코틀랜드의 로열 리덤&세인트앤스 링크스. 이곳은 1926년 보비 존스 이래 미국 선수의 우승이 나오지 않았기에 미국 선수들의 각오는 남달랐다. 대회 첫날부터 니클라우스를 필두로, 톰 왓슨, 헤일 어윈, 벤 크렌쇼, 조니 밀러 등 당대 최고의 미국 선수들이 선두 그룹에 올랐다.

유럽 선수 중에는 딱 한 명만 선두 그룹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골프변방 취급을 받던 스페인의 바예스테로스라는 22세 풋내기였다. 어윈이 68타, 크렌쇼가 71타, 니클라우스와 왓슨이 72타를 기록하며 상위권에 포진했고, 바예스테로스는 73타였다. 반전의 분위기는 2라운드부터 형성됐다. 3주 전 US오픈을 우승했던 어윈이 메이저 2연승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가운데 바예스테로스가 65타를 쳐 선두 어윈에게 2타 차 2위로 올라선 것. 3라운드에서 챔피언조의 어윈과 바예스테로스는 긴장한 탓에 나란히 75타로 동반 부진했다. 마지막 4라운드에서는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선수 대부분이 오버파 행진을 했지만 바예스테로스는 타수를 가까스로 지켰다. 그 역시 드라이버 샷이 페어웨이를 벗어나는 등 어려운 경기를 펼쳤지만, 세컨드 샷으로 그린에 올려 파 세이브를 하는가 하면 이따금 버디를 뽑아내며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어윈은 무너져 선두경쟁에서 멀어졌고, 대신 니클라우스가 선두 바예스테로스를 한때 1타 차까지 추격했지만 뒤집지는 못했다. 바예스테로스는 데뷔 3년 만에 메이저대회 우승을 하며 단숨에 스타가 됐다.

바예스테로스는 머뭇거림 없는 빠른 스윙을 하며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구석구석을 공략해 세이브 샷을 잘하는 재주꾼으로 묘사되며 미국의 월터 하겐과 곧잘 비교됐다. 미남형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어서 스타 부재의 세계 골프에 활력을 불어넣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언론은 그의 브리티시 오픈 제패가 우연이며 까다로운 미국 무대에서 우승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바예스테로스는 이듬해인 1980년 마스터스에서 장타와 정교한 쇼트게임을 앞세워 그린재킷을 차지해 ‘미국 골프정복’을 알렸다. 이어 1983년 마스터스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1984년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브리티시오픈을 제패했다. 이쯤 되자 미국 언론도 자국 선수를 따돌리고 세계 1위에 오른 바예스테로스를 유럽에서 온 이방인이라고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미국 기세에 눌렸던 유럽 골프는 중흥기를 맞았다. 호주의 그레그 노먼, 영국의 닉 팔도와 샌디 라일, 이언 우즈넘 그리고 독일의 베른하르트 랑거까지 유럽 무대 출신 선수들이 미국 골프를 연이어 정복했다. 이들은 ‘유럽투어의 6인방’으로 불렸다. 바예스테로스는 유럽골프의 미국 무대 정복에 있어서 선구자 역할을 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메이저에서는 5승에 머물렀다. 2007년 은퇴한 후 후배 양성에 투신했지만, 2008년 비행장에서 쓰러져 뇌종양 진단을 받고 3년간 투병한 끝에 2011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남양주골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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