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전직 여승무원 모임인 카사(KASA) 회원들이 지난해 10월 28일 강원 홍천군 남면 명동리마을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따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대한항공 전직 여승무원 모임인 카사(KASA) 회원들이 지난해 10월 28일 강원 홍천군 남면 명동리마을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따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대한항공 - 강원 홍천 명동리

지난해 10월 28일 진행된 대한항공과 강원 홍천군 남면 명동리마을의 1사1촌 행사는 확실히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소속이나 직함 없이 서로를 부르는 분위기가 명절 때 가족 행사를 연상케 했다. 오전 9시쯤 이 마을 해밀학교 운동장에 도착한 버스가 40여 명의 임직원과 그 가족들을 내려놓자 아이들은 마을 어르신 품에 자연스럽게 안겼다. 주민들은 올해 옥수수 농사가 어땠는지, 마을회관에 새 물건으로 무엇을 들여놨는지 등 사람 사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풀어놨다.

최원국(63) 전 이장은 “강산이 한 번 바뀌고 2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나면서 단체 간 연중행사의 성격을 초월한 것 같다”며 “처음엔 평범한 1사1촌 운동처럼 단체에 맞춰지던 행사의 초점이 언제부턴가 사람에 맞춰지게 됐다”고 말했다. 대한항공과 명동리는 전국적인 1사1촌 운동이 시작되던 2004년 처음 만난 뒤 1년에 두 차례씩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얼굴을 맞대왔다. 공과 사의 경계가 옅어진 흔적은 이한아(29) 대한항공 총무과 사원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봄까지 5년째 명동리를 찾은 그는 이날 업무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딸의 직장 업무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려고 인연을 맺은 명동리마을이 이제는 아버지, 어머니의 생활 일부로 자리 잡았다.

본격적인 작업은 1사1촌 ‘베테랑’ 임직원의 활약 덕분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중년 여성 4명이 들어선 고추 비닐하우스. 대한항공의 전직 여승무원 모임인 카사(KASA)의 회원인 이들은 “1분에 20개 이상은 따야 한다”며 “아줌마 파워를 보여주자”고 사기가 한껏 올라와 있었다. 주민과 피아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고추 따기에 열중하고 있던 배정미(여·59) 씨는 “어느덧 명동리마을에 온 게 8번째”라며 “고추밭 하나를 다 털어버린 2년 전만큼 오늘 페이스가 좋다”고 말했다. 김혜정(여·53) 씨는 “현장 적극주의의 승무원 마인드가 몸에 남아 있어 수확 철을 맞아 일거리가 많은 이 비닐하우스가 우리에게 적격”이라며 “명동리마을에서 고추 따기는 2번째인데 스스로 놀랄 정도로 잘하고 있다”고 뿌듯해했다.

시들어버린 농작물을 대하는 자세도 주민과 다를 바 없었다. 고추밭 한편에서 생기 잃은 빨간 고추를 바라보던 박태식 대한항공 원동기정비공장 차장은 “일반 농약을 22년째 안 치고 친환경 농법을 고수하다 보니 버려야 하는 게 생긴다”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기면서 주민들과 공감하는 걸 보면 이 마을 사람이 다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명동리를 진짜 고향처럼 여기는 참가자도 있다. 김학신 대한항공 기내식생산팀 과장의 아들 승기(8) 군이 그런 경우다. 다음에도 또 와달라는 어르신들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100년 동안 올게요”라고 해맑게 대답하는 게 딱 할아버지 댁에 놀러 온 손자의 반응이다. 김 과장이 “아빠가 그렇게까지 오래 회사 못 다닐 텐데 너 혼자 올래”라고 응수해도 승기 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다.

옥수수밭 비닐을 거두는 작업에서는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어색함 없이 벌써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밭에 발을 푹푹 빠뜨릴 때마다 바지에 흙이 잔뜩 묻어나는 악조건에서도 신나게 일하는 승기 군의 모습이 마을 어른들은 그저 대견한 눈치다. 주민 최훈(69) 씨는 “오전에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짐을 아쉬워할 만큼 정이 많이 들었다”며 “승기 군이 앞으로도 오래 마을을 찾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8년째 1사1촌에 참가하고 있는 김 과장은 “승기가 2년 전 처음 마을을 찾았을 때만 해도 낯가림이 있었다”며 “도시에서 하기 힘든 값진 경험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이상으로 마을을 각별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홍천=이근평 기자 istandby4u@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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