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용 논설위원

편집국장 재임 때 박근혜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한 적이 있다. 그가 한나라당 전 대표 시절이던 2009년 5월로 기억된다.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도 동석했다. 식사를 마친 후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이 의원이 특유의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국장님! 우리 대표님이 한 분과 3시간 넘게 대화를 나눈 적은 처음입니다. 대만족입니다.”

순간 고맙다고는 했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편하게 한번 보자며 만난 자리라지만 그의 답변에 적잖은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었다. 교육에 대해 물었더니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야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농업에 대해서도 “농촌이 잘 돼야죠” 정도의 답변이었다. 며칠 전 서재 한편에 박힌 당시 취재수첩을 꺼내 봤다. 그의 첫인상이 이렇게 적혀 있다. “중학생도 이해할 만한 평이한 화법으로 짧게 당위적 답변을 한다. ‘어떻게’는 없다. 시종 진지한 모습은 신뢰를 준다. 로열패밀리다운 우아한 어투는 인상적”. 헤어지면서 그에게 건넨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대표님, 신뢰 있는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으세요. 혹 대통령이 안 되더라도 그게 더 성공한 정치인입니다.” ‘대통령이 안 되더라도’라는 토를 단 게 찜찜했지만,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신뢰의 정치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 즉흥적으로 던진 덕담이었다.

대통령이 된 이후 그는 ‘신뢰’를 입에 달고 다녔다. 취임사에서도,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대외 행사에서도 핵심어는 신뢰였다. 일부를 최순실이 불러준 대로 읽었다는 의혹이 있는 3년여 전 칭화(淸華)대 연설 주제도 ‘한·중 신뢰의 여정’이다. 그런 그가 ‘불신의 대명사’로 전락할 처지에 놓인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비밀은 신뢰의 천적이다. 그런데도 ‘세월호 7시간’에 대해 군색한 스무고개식 변명으로 진실을 덮으려 한다. 국민 앞에 서서 억울함을 호소할 절호의 기회인 헌재 소명에도 소극적이다.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잖아도 한국은 ‘신뢰절벽’에 직면해 있다. 당리당략에 빠져 아귀다툼하는 정치권이 맨 끝에 서 있다. 사법부, 행정부, 학교, 기업, 언론도 그 뒤에 바짝 붙어 있다. 우리의 불신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OECD 보고서다.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사법제도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27%만이 믿는다고 했다. 34개 회원국 중 33위다. 정부를 신뢰한다는 응답자도 34%다. 10명 중 6명 이상이 정부를 믿지 않는다.

불신은 특히 경제에 치명적 독이다. 신뢰는 상거래의 기초로, 경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신뢰경제학의 권위자 스티븐 낵 박사에 따르면 미국의 국민소득 중 0.5%만이 땀 흘린 결과이고, 99.5%는 신뢰의 산물이다. ‘트러스트’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도 한 나라의 경쟁력은 신뢰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그러니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진 우리나라가 저성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리라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다.

우리의 신뢰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주범은 부정부패, 붕괴된 법치, 실종된 경제적 자유, 부도덕한 지도층이다. 6·25전쟁, 급격한 도시화, 권위주의적 근대화를 겪으면서 불신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흑역사도 한몫했다. 탈법과 탐욕에 찌든 각계 고위층 일각은 대한민국을 ‘불신공화국’으로 몰고 간 일등공신이다.

신뢰의 불씨를 다시 살릴 길은 없는가. 인류가 핵전쟁 위험에 가장 근접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이 한 말이 그 답을 대신한다. 쿠바공습 여부를 놓고 고독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는 참모진을 긴급 호출한다. “내가 지금까지 쿠바와 관련해 언급한 발언들을 모두 모아서 가져오라”. 지도자가 일관된 행동을 보여야 국민 신뢰도 쌓이고, 국가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일깨우는 일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고별 연설을 하면서 8년 전 대선 때 내건 구호인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로 마무리한 점도 같은 맥락이다.

조기 대선을 앞둔 잠룡들이 또 ‘지르고 보자’식 공약을 마구 쏟아낸다. 포퓰리즘 광풍이 몰아닥칠 기세다. 하지만 이번만은 속지 말아야 한다. 이제부터 그들의 언행이 한결같은지를 찬찬히 뜯어보시라. 법치를 존중하고 준수하는지도 따져 보시라. 그래야 ‘불신 악령’도 떨쳐내고 ‘얼치기 지도자’도 솎아낼 수 있다. 보수든, 진보든 차기 대통령의 필수 덕목은 ‘신뢰와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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