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 경제산업부장

우리나라는 경제적 황무지에서 선진국에 버금가는 번영을 이룬 유일한 나라다. 국민의 피땀에다 다양한 요인이 긍정적으로 결합한 결과겠지만, 창업 1세대의 기업가정신이 항상 최전선에서 이끌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기업가정신 수준이 137개국 중 27위로 경제 규모가 작은 칠레, 에스토니아보다 뒤처진 것으로 나타났다.(문화일보 1월 17일자 2면 참조)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11월 발표된 미국 세계기업가정신발전기구(GEDI)의 ‘2017 글로벌기업가정신지수(GEI)’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25위)에도 4년 만에 역전을 당했다. 미국이 1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에선 23위로 중하위권이다. 국내로 돌아온 유턴 기업이나 투자 기업을 우대했던 미국·일본 등과 달리,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광풍처럼 몰아친 경제민주화 바람 앞에 섰던 국내 기업 사정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GEI는 태도·능력·열망의 3개 범주와 14개 세부 항목에 걸쳐 설문조사와 관련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매겨진다. 항목별 한국 GEI를 보면 더 참담하다. 한국은 열망이 가장 높고 능력과 태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불균등한 기업가정신 생태계를 갖고 있다는 게 보고서의 진단이다. 태도 범주에 속한 세부항목들이 가장 낮았다. 이는 기업경영·기업가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을 말한다.

특히 낮게 나온 세부 항목은 창업에 대한 ‘기회인식’과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시각을 보여주는 ‘문화적 지원’이었다. 14개 항목 중에 각각 2, 3번째로 낮았다. 성공한 기업가에 대한 위상이 높지 않고(53.52%), 기업가를 선호할 만한 직업으로 보는 시각이 매우 낮았다(38%).

창업이나 신사업의 질적 측면을 측정하는 열망 범주의 경우 ‘고성장’ 항목은 4번째로 낮았다. 향후 5년 내 50% 이상의 성장을 계획하는 기업의 비율(22.09%)이 낮고, 국가 전반적인 사업 성숙도는 보통인 편이며, 창업기업들의 자금 조달 가능성은 140개국 중 86위로 매우 낮은 탓이다. 올해 벤처·창업 활성화 예산이 전년 대비 12% 증가한 2조3752억 원이라는데, 그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에 투자되고 있단 말인가. GEDI는 태도, 능력, 열망 3개가 균등한 수준으로 발달해야 건강한 기업가정신 생태계라고 정의한다. 이는 기업·기업가의 투명경영·공정경쟁 노력과 함께, 사회적 인식과 제도변화도 뒷받침돼야 가능한 것이다.

기업가의 조건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윤추구에서 이를 통한 국가 경제 기여·사회적 책임의식이 보태졌으나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과 새로운 것에 과감히 도전하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정신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기업에 대한 인식이나 위상을 보면 ‘한국판(版) 기업가정신’은 상당히 해석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특히, 무엇을 하라는 포지티브 리스트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네거티브 리스트를 더 중시해야 할 판이다.

우선, 정부 정책에 협조한답시고 선뜻 나서지 말아야 한다. 기금 출연은 절대 금물이다. 명분이 그럴듯해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게 아니다. 시류가 달라지면 권력 강압의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으로 몰린다. 최고 권력자가 독대를 청해도 솔깃하지 말고, 칭병하며 버티는 게 배짱 있는 도전정신이다. 협조하지 않았다가 보복을 당할 것 같아도 대들지 마라. “뭘 안 주면 안 줬다고 패고, 주면 줬다고 패는” 시대다. 차라리 사업을 해외로 옮기는 게 현명한 도전이다.

불합리한 규제나 애로가 있어도 정부와 협의하지 마라. 잘못하면 뇌물 로비가 된다. 꼭 해야 할 게 있으면 여럿을 동원하거나 광장에서 논란을 만드는 방법을 찾는 게 창의적인 정신이다. 집단시위 수준에 이르게 했다면 거의 성공이라고 확신해도 된다. 생떼를 쓰고 피켓을 드는 건 부정청탁이 아니다. 정부나 정치권이 일자리 만들어라, 투자하라고 겁박해 응하더라도 뒤통수를 조심해야 한다. 언제 법의 올가미를 씌울지 모른다.

기업가 정신을 조롱하려는 게 아니다. 세태가, 권력이 기업가정신을 ‘농단’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얘기다. 기업 하기 힘든 나라에서는 기업가정신도 일그러진 시대를 반영해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기업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도 정의의 요건 중 하나다.
오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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