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 워싱턴은 권부(權府)이기도 하지만, 저항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기득권층의 집합소이기도 하지만, 저항이 응집·폭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 주말, 워싱턴은 이런 양극단의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지난 20일 개최된 도널드 트럼프 제45대 대통령 취임식이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알렸다면, 다음 날인 21일 열린 ‘여성들의 행진(Women’s March)’은 새로운 정치운동의 가능성을 열었다.
직접 찾아본 이 2개 행사는 많이 달랐다. 취임식은 정부 행사인 만큼 질서정연했다. 취임선서 연단에는 전직 대통령부터 상·하원 주요 인사가 줄지어 앉아 있었다. 참석자들은 백인이 90%에 가까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고 외치자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반면에 여성행진은 중앙 무대가 있었지만,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구호를 외치고 공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노부부에서 10대 청소년까지, 백인에서 히잡을 쓴 무슬림까지 세대·인종별로 다양했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여성비하 발언을 비판하는 상징인 분홍색 ‘푸시 캣’ 모자를 쓴 채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Love Trumps Hate)’ ‘품격 있는 사람은 평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한가지 공통점은 최북단 메인주에서 서부 캘리포니아, 남부 조지아·텍사스주까지 미국 전역에서 참가자들이 몰려왔다는 점이다. 취임식·여성행진 참석을 위해 워싱턴을 찾은 인파는 최대 9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워싱턴 시내 호텔 숙박료가 취임식 특수에 1박 700달러까지 치솟았는데도 기꺼이 자비를 들여 워싱턴을 찾았다. 역대 가장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둘러싸고 미국은 극심한 분열상의 민낯을 드러냈지만, 좌·우를 떠나 미국인들의 정치적 열정은 여전히 살아 있는 셈이다.
이는 미국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결돼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정치적 분열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언론들은 취임식 당일만큼은 “평화적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는 점에 방점을 뒀다. 포퓰리즘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22일 트위터에 “평화적 시위는 우리 민주주의의 특징(hallmark)이다. 내가 항상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권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제 문제는 민주주의 기반하에서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표출된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느냐다. 핵심은 터져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를 정치가 얼마나 잘 반영하느냐에 달렸다.
트럼프 대통령도 세계화로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백인 노동계층의 불안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데 성공하면서 권력을 쥐었다. 이 때문에 여성행진 주최자들도 이번 행사가 흐지부지 끝났던 2011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를 넘어 공화당 성향의 극우 유권자 풀뿌리 운동체인 티파티처럼 민주당 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물론 최종 숙제는 정치인들이 풀어야 할 몫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역사는 1913년 여성 참정권 행진, 1932년 보너스 군대 행진, 1963년 일·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 1974년 삶을 위한 행진 등을 겪으면서 여성·참전군인·흑인·성적 소수자 등을 끌어안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이는 제도권 밖의 국민적 함성을 포용해 제도화해온 정치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미국인들이 ‘트럼프 시대’에도 민주주의에 대해서만은 낙관하는 이유다.
한국도 지난해 대규모 촛불집회 이후 대의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올라있다. 정치권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민주주의 역할·기능부터 깊게 고민하고 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 만일 정치가 민의를 반영하는 데 실패한다면 제도권 밖 함성은 질주하고, 포퓰리즘이 득세하면서 우리도 전 세계에서 하나둘 탄생하고 있는 ‘괴물’ 지도자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boyoung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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