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회사인간’은 직장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일본 사회의 속성을 빗댄 말이다. 일본 직장인은 연일 야근도 감내하며 회사에 충성하고, 기업은 그런 직원들에게 종신 고용과 복지를 보장했다. 그래서 회사인간에게는 ‘평생직장’이란 말이 따라붙는다. 종신고용제는 1980년대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전성시대를 이끈 무기이기도 했다. 그랬던 일본 직장에 혁신적 변화가 휩쓸고 있다. 일 많이 하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꼭 회사에 나가 일해야 하는 것도, 굳이 한 기업에서만 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회사인간의 토대인 정규직 위주 연공서열 체제에도 금이 가고 있다. 일본 노동시장이 급격히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2차 아베노믹스가 전환점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양적완화와 엔저를 무기로 한 1차 아베노믹스를 통해 기업의 이익을 늘리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아베 정부의 이른바 ‘관제 춘투’에도 임금 인상과 소비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랜 침체를 겪은 기업들의 몸조심 탓이다. 2차 아베노믹스에서는 구조개혁을 통해 소비를 확산시켜 지속적 성장을 도모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구조개혁의 핵심이 ‘유연한 노동’이다. 장관급인 ‘일하는 방식 개혁 담당상’도 신설했다. 일하는 사람을 늘리고, 근로자 소득을 늘리고, 소비할 시간도 늘리는 것이 세부 목표다. 최근 2∼3년 새 산업 현장에 나타난 변화는 놀랍다.

우선 휴식 있는 삶으로 가는 흐름이다. 과로사(過勞死)를 뜻하는 ‘가로시(karoshi)’가 영어사전에 등재될 만큼 일본의 장시간 근무는 정평이 나 있다. 야근 후 8∼12시간 이내엔 출근을 못 하게 하는 ‘근무 간 인터벌제’가 기업에 속속 도입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1993년부터 법으로 11시간 휴식을 강제해온 그 제도다.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패스트리테일링은 하루 근무시간을 8시간에서 10시간으로 늘린 대신, 주 3일 휴무제를 도입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정규직의 부업·겸업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일터가 일보다 사람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재택(在宅)근무도 빠르게 확산 중이다. 토요타자동차의 경우 직원 3분의 1은 1주일에 2시간만 회사에서 근무하면 된다. 주요 기업 중 재택근무 도입을 결정한 곳이 절반이다. 재택근무는 아베 총리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위미노믹스(Womenomics)’, 곧 여성인력 확보와도 맞물려 있다. 일본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1995년을 정점으로 줄곧 떨어지고 있는데, 젊은 여성은 육아휴직에다 최근에는 거동 못 하는 부모를 돌보는 ‘간호휴직’까지 떠맡는 처지다. 이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하려면 재택근무를 포함해 유연한 근무 방식이 필수다. 올 들어서는 여성을 가사에서 풀어주기 위해 외국인 가정부 도입 카드까지 꺼낸 아베 정부다.

일본 정부의 ‘동일노동·동일임금’ 지침도 정규직 기득권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본급은 물론, 상여금·교통비·식대 등의 차별을 없애 정규직의 60%인 비정규직 임금을 유럽 수준인 80%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2015년 일본 비정규직 비율은 37.5%지만, 15∼24세에선 48.3%다. 비정규직으로 사회 첫발을 내디딘 청년들의 지갑을 채워주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생산인력 감소와 고령화 덫에 빠진 일본은 경제활력 회복을 위해 일하는 방식을 고쳐가고 있다. ‘1억 총활약사회’라는 총론 아래 정부와 기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론을 내놓고 차근차근 한발씩 나아가는 양상이다. 일본식 노동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회사인간, 평생직장 등 일본 특유의 산업화시대 노동규범과도 과감히 결별하고 있다. 우리가 자주 보았던 것처럼 노동계나 정치권이 발목을 잡는 장면은 찾기 어렵다.

일본이 시대정신에 맞는 노동시장 재편 승부수를 던진 것과 달리 국내에선 도무지 그런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요란했던 노동개혁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로 없던 일이 됐다. 일본보다 훨씬 심각한 근로시간만 해도 단축 법안이 국회에 방치돼 있다. 다른 한편에선 현실과 괴리된 사이비 일자리 공약이 판친다. 일본 방식이 최선은 아니겠지만, ‘유연한 노동’이란 키워드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근로자 간 차별의 벽을 없애고 다양한 근무형태를 도입해 노동시장의 역동성을 키우는 것이 바로 노동개혁이다. 차기 정부가 최우선으로 할 일이 청년·여성·비정규직에게 기회와 희망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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