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25일 관훈토론은 그의 대권 행보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될 만하다. 외교적 수사(修辭)로 치장한 두루뭉술 어투가 사라졌고 정치적 치열성과 전투적 근성이 엿보였다. 분명한 대권 도전 의지가 느껴졌고, 현안 관련 질문에 기름장어같이 빠져나가는 일도 드물었다. 정치 야생(野生)에 뛰어든 지 2주일 만에 확인된, 솔직히 예상치 못한 변화다. 귀국 후 지금까지 보여온 것과는 달리 확신·집념·의지가 넘쳤다. 한편으로는 ‘1등 주자 때리기’를 통해 주목도를 높여 지지도를 회복하려는 의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권 다수 개헌론자에 대한 구애(求愛)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날 반 전 총장은 현재와 같은 제왕적 대통령제로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고, 권력 독점이 초래하는 저주와 재앙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는 나름의 개헌 철학을 천명했다. 국민 대다수가 개헌에 찬성하는 상황에서 제1당 후보가 될 분이 못하겠다는 건 ‘탐욕’이라고 공격했고, 현 체제에서 (정권이) 넘어가면 또다시 제왕적인 대통령제에 갇히게 된다면서 “개헌 없는 권력교체는 패권교체”라고 지적했다. 반 전 총장은 분권형을 전제로 한다면 대통령 중임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 구체적인 권력구조의 상을 제시했고,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대선 전 개헌’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개헌을 기둥 삼아 빅 텐트를 치고 오는 대선을 ‘개헌세력 대 반개헌세력’의 대결구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단의 정치 그룹과 맥이 닿아 있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선 전 개헌을 하려고만 마음먹으면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도 “의지와 결단과 선택의 문제”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반 전 총장의 이날 작심 발언은 김종인·손학규·박지원·김무성 같은 개헌을 위해 뛰는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獻辭)이자 동지적 연대감을 표하는 메시지이며, 차기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대선 전 개헌 연대’를 하자는 구체적인 제안이다. 제3지대 일각에서는 친문(친문재인) 진영을 배제한 개헌·연정 추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온다.
21세기는 독점을 대체하는 분권의 시대다. 1987년의 낡은 체제로 2017년 대한민국을 이끌겠다는 건 시대착오다. 탄핵 국면에서 국무총리에 지명됐던 김병준 교수가 며칠 전 펴낸 ‘대통령 권력’이란 책 끝부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얼마나 많은 대통령이 만신창이가 되어야 그것이 개인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까. 얼마나 많은 정치지도자가 나쁜 놈, 더러운 놈이 되어야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까.…대통령을 탄핵하는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다. 잘못된 정치와 국가운영체계를 탄핵해야 한다.” 대통령 단임제 도입 후 30년간 역대 대통령의 말년이 예외 없이 비탄과 죽음과 탄핵으로 끝맺었다면 그 제도는 용도 폐기돼야 한다. 김영삼·김대중이 그랬고, 노무현이 그랬고, 박근혜가 그랬다. 참여정부의 기획자였던 학자의 충정 어린 고백에, 연정과 협치의 시대로 가자는 정치권의 요구에, 비극을 끝내자는 대다수 국민의 열망에, 이제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가 답해야 할 때다.
mi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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