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질서를 어지럽힌 국정농단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이다. 법치주의 국가이기에 모든 것이 법에 규정된 바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주권자인 국민의 속은 답답하기만 하다. “모릅니다”와 “기억나지 않습니다”를 남발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률 전문가들의 행태에, 이른바 ‘법꾸라지’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정치 상황이 그래서인지,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드라마는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상황에서 시작한다. 강력사건 전담부서인 서울 중앙지검 강력부의 에이스 검사 박정우(지성)는 차명그룹 부사장 차민호(엄기준)의 별장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수사하다가 가족을 죽인 살인범으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별장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차민호가 죽인 쌍둥이 형 차선호(엄기준)를 대신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의 실체를 밝히려다가 기억을 잃고 피고인 신분으로 교도소에서 눈을 뜬 것이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법대와 사법연수원 동기로 중앙지검에서 함께 근무했던 15년 지기 강준혁(오창석)은 1심에서 기억을 잃은 상태에도 절대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죽일 리 없다는 박정우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사건은 박정우가 기억을 잃게 된 4개월 전으로 돌아간다. 박정우는 만약 자신이 아내 윤지수(손여은)의 불륜을 의심하고 다투다가 칼로 찔러 죽이고 어린 딸마저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것이 사실이라면, 몇 번이고 사형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가 꺼려하는 변호를 맡겠다고 찾아온 국선변호사 서은혜(권유리)를 외면한다.

서은혜가 선임계와 함께 건넨 볼펜의 심을 몰래 빼돌렸다가 발각된 박정우는 때마침 교도소를 찾아왔던 차민호를 인질로 잡고 난동을 부리다 징벌방에 갇힌다. 징벌방에 갇힌 박정우는 교도관이자 매형에게 가족을 잃은 처남 윤태수(강성민)가 조카의 시신을 어디에 유기했는지 기억해내라며 건네준 가족사진을 보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바닥에 떨어진 가족사진을 주우려다가 아내가 붙여준 별명 ‘박봉구’라는 이름이 바닥에 새겨진 것을 발견한 그는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꿰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어쩌면 자신이 알 수 없는 외부 힘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억을 상실했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그는 기억을 되찾아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박정우의 기억에 이상이 생긴 것은 쌍둥이 형을 죽이면서까지 별장 살인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차민호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개된 상황으로 짐작건대 자신의 범죄행위가 발각될 것을 우려한 차민호가 박정우의 기억을 왜곡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차민호가 절대 재력으로 공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진실을 밝혀야 하는 박정우의 몸부림이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잔인한 살인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수사 주체인 검사의 기억을 조작하는 극적 상황이 어쩌면 현실에서도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유권무죄 무권유죄’는 절대 통념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모릅니다”와 “기억나지 않습니다”를 남발하면서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법률 전문가들의 행태를 지켜보다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충남대 교수·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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