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문화부 부장

화제와 관심 속에 시작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케이블 방송 최고 시청률 기록을 갈아치운 드라마 ‘도깨비’ 그리고 지난해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국 소설인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주인공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 또는 미래에 떨어지는 타임 슬립(Time Slip)이다.

근대적 타임 슬립 장치는 19세기 말부터 판타지와 과학소설(SF)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익숙해진 것이지만 요즘 문화 전반에서 일고 있는 인기는 ‘타임 슬립 러시’ ‘타임 슬립 붐’으로 불릴 만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중 국내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신카이 마코토(新海誠)의 ‘너의 이름은.’도 타임 슬립 계열이니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타임 슬립 장치는 6세기 영국으로 건너간 19세기 미국인을 그린 1889년 마크 트웨인의 소설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에서, 사람이 과거와 미래로 이동하는 시간 여행(Time Travel)은 1895년 H G 웰스의 ‘타임머신’에서 출발했다.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뀌어 주인공의 운명을 옥죄는 ‘타임 패러독스’도 이미 1944년 프랑스 SF의 선구자 르네 바르자벨의 소설 ‘경솔한 여행자’에 등장했다. 바르자벨이 구현한 패러독스는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가서 자기 조상을 살해하면 시간 여행자는 태어날 수 없고 그러면 시간 여행 자체가 불가능해지므로 조상을 살해할 수 없다는, 그 유명한 ‘할아버지의 역설’이다.

뭉뚱그려 타임 슬립으로 부르지만 세심하게 따져보면 조금씩 차이는 있다. 예를 들어 타임 슬립의 가장 핵심 룰은 주인공이 시간을 뛰어넘는 일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그 과정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깨비’는 타임 슬립이라기보다는 불멸의 존재가 겪는 길고 긴 시간의 이야기이며, 우편함을 통해 현재의 주인공이 과거 사람들과 상담 편지를 주고받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타임 슬립 요소가 중심인 정도에 그친다.

이렇게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역사적으로 타임 슬립의 출발이 된 작품들은 주로 인간과 인간 문명, 혹은 사회나 제도를 통렬히 비판하고 풍자하기 위한 우화적 장치였던 데 비해 요즘 타임 슬립은 하나같이 ‘운명을 바꾸는 것’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시간을 거슬러 연인을 살리고, 역사를 바꾸고, 인류를 구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타임 슬립은 인간 중심적인 현대 문명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과학과 문명의 힘으로 숱하게 한계를 뛰어넘어온 인간이 거의 마지막 벽인 시간마저 뛰어넘겠다는 욕망이자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며, 자신의 역사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 쓰겠다는 주체적 열망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듯이 타임 슬립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판타지이다. 열망과 의지는 현실 역사 속에서 구현해야 한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의 마법은 현재를 충실히 살아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뿐이다. 정유년을 출발하며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 해 끝에 서서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하고 아쉬워하는 일들이 많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정치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올해는 특히 그렇다.

chm@munhwa.com
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