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정치학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각 후보 진영의 셈법이 요동치고 있다. 경쟁하던 빅텐트 하나가 무너지면서 다른 하나의 빅텐트는 세 확장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빅텐트가 사상누각일 뿐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반 전 총장의 불출마는 이번 대선 정국에서 잠재적 정책 경쟁의 한 축이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특히, ‘진보적 보수주의’로 대변되듯이 중도와 보수를 아우르는 정책적 입장이 중심을 잃은 것이다. 이념적으로 극단적 보수와 중도의 중간 위치에서 세력을 키우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출마가 기존 경쟁자들에게 이익인 것만은 아니다.

우선, 남아 있는 빅텐트 옹호자들은 그러지 않아도 모호했던 정체성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더욱 모호해질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빅텐트는 일정한 정책적 신념 및 이념에 근거한 정체성보다는 다양한 생각과 선호를 가진 유권자층을 포괄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포괄하고자 하는 범위를 더욱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전략적으로 이점일 수 있다.

그러나 촛불 정국을 통해 드러난 민심(民心)은 이번 대선에서 ‘누군지 알고 뽑겠다’는 데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내 살기 바빠서’ 또는 ‘내 식구 먹여 살리기에 바빠서’ 투표하지 않았거나, 꼼꼼히 따져보지 못했던 과거와는 달라지겠다는 유권자들의 변화를 감지해야 할 것이다. 빅텐트가 선거 승리를 위한 하나의 유용한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 효과적인 전략이 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현재까지 지지율 선두를 유지해온 세력에게도 변화한 상황이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의 후보자군이 핵심 지지층을 중심으로 지지층 확대 전략을 추구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책적으로 명백한 차별화를 시도할 수 있었던 반 전 총장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척점에 있던 세력이 힘을 잃은 현재 상황은 자신들을 부각시킬 수 있는 비교 기준점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똑같은 야당의 위치에서 빅텐트를 주장하는 세력들과의 정책적 중첩성 또는 유사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 전 총장의 불출마로 인해 갈 곳을 잃은 유권자층을 흡수하기 위한 전략을 펴기도 힘든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세력 분화를 전제로 정책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던 기존의 전략은, 전제가 됐던 정치적 조건이 변화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추구하기 어렵다.

또한, 정책적 정체성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포괄할 수 있는 지지층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지지층 확대라는 목표 달성보다는 몰(沒)정체성만을 가져올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 서로 상이한 정책 지향을 지닌 다수 후보 경쟁 구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전략적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반 전 총장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에 관한 전망도 밝지 않다. 촛불 정국을 지나며 보수층을 결집하면서 동시에 중도 성향 유권자의 지지를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됐던 후보자는 매우 드물었다. 이들 후보자의 능력 및 대중성이 반 전 총장의 귀국 이전 시점과 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그의 대체 세력으로 결집될 수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이후 대선 정국은, 현실감이 없어 보였던 중도와 보수파의 규합이 선거 결과의 예측에 중요성을 더해가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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