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예피아’(예술의전당+마피아)라고도 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공채 출신들이 공연계를 ‘접수’하다시피 해서다. 1988년 문을 연 예술의전당은 관행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술 경영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0년대 이후 이곳 출신 전문 예술 경영인들이 각지에서 트렌드세터로서 큰 흐름을 이끌었다. 현재 국내 대표 두 공공 극장의 수장도 이들 예술 경영 1세대다. 2012년 부임 후 올해 3연임이 결정된 안호상 국립극장장과 2015년 고사(枯死) 직전의 세종문화회관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이승엽 사장을 만났다. 예술의전당 공채 1기와 2기인 두 사람은 문화체육관광부(국립극장)와 서울시(세종문화회관) 소속으로 ‘다른’ 신분이지만 ‘잘 되는 공연장’을 위해 제시한 방향은 비슷하다. 시즌제 도입, 전속 단체 중심 자체 제작 등이 대표적. 각 극장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안호상 국립극장장 “누가, 왜 왔나… 관객 집중 연구”

“구호(KUHO) 옷을 입는 40∼50대 여성들이 정구호 연출을 보러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재미난 추측도 해보고 있어요.” 정구호 연출의 국립무용단 ‘향연’의 인기 비결을 묻자 돌아온 답이다. 정 연출은 패션 디자이너 출신으로 과거 제일모직(현 삼성물산 패션 부문) 전무로 브랜드 ‘구호’를 이끌었다. 8일 개막하는 향연은 2015년 초연 후 세 번째 시즌으로 올해 한 회차 늘렸는데 벌써 표가 동났다. 작품성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란 듯이 매진으로 응수하고 있다. 그래서 안 극장장은 늘 관객이 궁금하다. “누가 왔나, 왜 왔나, 또 올까를 생각해요. 고맙고 또 무서운 게 관객이죠.”

안 극장장이 최근 세 번째 연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8할이 관객 덕이다. 국공립 공연기관 최초로 도입한 시즌제(연간 공연 프로그램을 결정하고 티켓을 미리 파는 제도), 오페라 요소를 도입한 파격적인 창극, 현대 무용가와 패션 디자이너가 합작한 한국 무용 등 문화계 모두가 고개를 저었고 내부에서도 반신반의했던 안 극장장의 시도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 준 게 바로 관객들이었다. 그는 “2012년 스릴러 창극 ‘장화 홍련’을 선보일 때 안팎으로 반발이 심했고, 완성도는 내가 봐도 아쉬웠다”면서도 “반응은 굉장했다. 객석이 들어차는 걸 보며 용기를 얻었다”고 밝혔다. “변화의 시작이었죠. 당시 장화 홍련 보신 분들을 만나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죠, 하하.”

1950년 설립된 국립극장의 공연은 전통을 기반으로 한다. 소중한 가치이지만 다소 고루하게 느껴져 관람이 쉽지 않았던 게 사실. 그런데 요즘 공연 마니아의 리스트엔 국립극장 공연이 반드시 들어간다. 안 극장장은 “좋은 것보다 새로운 것, 다른 것에 목마른 관객이 늘었기 때문이다”며 “우리 극장 작품이 예술적인 측면에서 라 트라비아타 같은 유명 오페라나 베토벤 교향곡처럼 완결성이 높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감동은 더 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가능성, 그동안 잊어버린 가치 등을 발견하게 되면 보다 너그럽게 공감해주는 것 같아요. 물론, 언제까지 거기에 기댈 수는 없지요. 실망시키지 말아야죠. 정말 관객들한테 ‘잘 보이고’ 싶거든요.”

안 극장장의 ‘관객 연구’는 계속된다. 1994년 예술의전당에서 어린이 공연을 처음 올렸을 때, 서울 강남이 아니라 의정부, 부천, 평촌 등에서 온 관객이 더 많았다는 것에 놀라 ‘공부’를 시작했다. 1999년 말러 교향곡 연주회엔 절반 이상이 ‘나홀로’ 관객들이었다. 프로그램 북을 사 로비에서 조용히 공부한 후 입장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최근 가장 관심을 끈 건 마당놀이에 오는 20∼30대예요. 예년에 비해 부쩍 젊어졌어요. 참, 신기해요, 하하.”

이승엽 세종문화회관 사장 “SNS 통해 직접 패키지 홍보”

“세종문화회관이 40년밖에 안됐는데 벌써 거대한 유적 같은 이미지가 있어요. 관광객들의 사진 배경이 되는 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역시 아트센터 하면 ‘예술’이 떠올라야 합니다. 서울의 랜드마크, 대한민국 예술명소로 발돋움해야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직을 관두고 2015년 초, 관객이 떠나 위기에 처한 세종문화회관에 부임한 이승엽 사장. 전문성과 함께 예술의전당에서 익힌 실무 감각까지 지녀, 전속 단체만 9개인 거대 조직을 이끌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사장은 “아직 그릇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담으려면 일단 그릇이 있어야 하죠. 지난해 ‘무데뽀’로 시즌제를 시작했는데, 취소 없이 공연 전부 무대에 올렸어요. ‘가능하다’는 걸 공유했으니, 그릇이 자리 잡는 속도만큼 완성도 높은 공연을 잘 담아내야죠.”

지난해 3월 과감하게 시즌제를 도입했고,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빚어지자 미련 없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탈퇴했다. 파격 행보는 계속됐는데, 지난가을엔 재정 적자 극복을 위해 자신의 월급을 반납해 화제가 됐다. 최근엔 두 번째 ‘세종 시즌’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SNS 등을 통해 직접 패키지 홍보에 나섰다. 그는 “판매 하루 만에 한정판 3종이 매진됐다. 전체 목표 수량 70% 가까이 달성한 것 같다”고 하더니 “나도 몇 개 확보해 둬야 할 것 같다”고 농으로 자랑을 했다.

국립극장 시즌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후 문화계에선 ‘세종 시즌’에 대한 관심이 높다. 클래식을 중심으로 오페라, 무용, 연극, 가족극, 뮤지컬을 아우르는 세종문화회관의 공연 프로그램은 다채롭다. 다만, 대중성과 예술성은 아직 검증 단계. 이 사장은 “내부자이다 보니 순수하게 감동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그는 “제작진이 물으면 ‘같은 식구끼리 뭘 묻냐’고 할 뿐이다”며 “시즌제가 바람직한 제도라는 걸 우리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관객도 확 늘어야 하고, 작품성도 상당한 수준으로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궁극적으로 프랑스 미테랑 정부의 ‘그랑 프로제’ 정책이 예술 도시 파리를 부활시킨 것처럼, 서울시가 검토 중인 세종로 예술복합단지 조성 사업을 통해 세종문화회관이 또 한 번 도약하기를 꿈꾼다.

프랑스는 1980∼1990년대 파리를 중심으로 랜드마크에 해당하는 건축물을 지었는데, 이 대규모 하드웨어 확장이 지금의 ‘파리 신(파리 문화계)’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냈다. “세종로 공원에 건립하려고 한 콘서트홀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리모델링을 묶어 새 관점으로 보는 프로젝트지요. 기존 인프라를 포용하는 신개념 콘서트홀이 이 일대 문화적 브랜드 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일 겁니다. 요즘 식 ‘그랑 프로제’입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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