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후반기 때다. 당시 이상득 의원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을 때 구치소로 접견을 간 적이 있다.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아니라, 도의상 찾아간 것이다. 그때 이 의원이 동생인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자기 장남이 자신에게 “이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쉬십시오”라고 말했다면서 고개를 떨구던 모습이 생생하다. 만일 그때 이 의원이 장남의 요청대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유유자적했더라면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元老)로 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에게는 존경할 만한, 특히 젊은이의 귀감이 될 만한 원로가 거의 없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국론이 분열됐을 때 국민이 그 말의 무게감을 피부로 느끼면서 위안 삼을 만한 원로가 몇이나 될까? 김수환 추기경, 법정(法頂) 스님, 함석헌 선생 같은 반열의 경륜을 갖춘 분들은 아니더라도. 원로가 거의 없다는 건 물러날 때가 됐는데도 물러나지 않고 권력욕·명예욕·재물욕에 집착하는 노욕(老慾) 때문이다. 노욕에 사로잡혀 쌓아온 명성마저 무너뜨리고 비참하게 퇴장한 원로들을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내가 존경했던 약전 김성식 교수, 5공 시대에 80이 다 돼서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직필을 휘둘렀던 분이다. 그는 한탄한다. 그동안 큰소리치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던 이른바 명사들이 늙어가면서 자기 의사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돈 따라, 권력 따라 노구를 이끌고 다니는 것은 민망스러울 정도라고. 그러면서 “노욕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해서 과분한 욕심 때문에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고 사소한 개인감정으로 대의를 저버리기 일쑤다”고 꼬집었다.(김성식, ‘쓴소리 곧은 소리’) 인생을 보려면 다만 그 만년을 보라는 ‘채근담’의 경구는 종종 곱씹어볼 만하다. 이제 세상을 달관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교훈을 줘야 할 명사들이 아직도 권력의 한쪽을 서성대거나 정권 창출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등에 휘말려 말년을 소모하는 것은 노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몇 년 전에 낸 저서 ‘사마천 한국견문록’에서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패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고문이 정계 은퇴를 하면서 던진 말을 원용했다. 그는 “정치인은 들고 날 때가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라며 “지금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 순리”라고 밝혀 사람들의 아쉬움을 샀었다. 나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썼다. 그런 그가 다시 대선에 도전하겠다고 나섰다. 책의 개정판을 써야 할 것 같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그는 이미 우리 젊은이들의 우상이고 세계인에게 각인된 인물이다. 나는 그가 퇴임 후에 국가와 국제사회의 원로로서 국내정치에 초연하면서 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귀국과 동시에 대권 도전을 선언하고 세를 규합하다가 여의치 않자 뜻을 접었다. 정치교체를 주장하면서도 정치교체와는 거리가 먼 인사들을 접촉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은 실망했을 것이다. 본인의 표현대로 자신과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를 남겼으며, 사회 원로로서의 이미지를 반감시켰다. 인명진 목사. 성직자이기도 한, 때로는 시민운동을 함께한 나로서는 그를 시민운동의 원로로서 존경했다. 그런 그가 국정 파탄의 한 축인 집권당의 비대위원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맡았다. 오죽했으면 그를 ‘경실련’에서 영구제명이라는, 규약에도 없는 처분을 했겠는가! 이 모두가 노욕의 소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만둘 때를 알고 물러나는 자의 앞에 꽃잎 화사한 또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강직하고 아름다운 정치인과 지도자들의 뒷모습을 보고 싶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는 폐부를 찌르는 말을 한다. “노욕은 나그넷길 얼마 남지 않았는데 노자(路資)를 더 마련하려는 것과 같아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사마천의 ‘사기’ 이장군열전 편에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명구가 나온다.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아래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덕과 경륜을 쌓으면서 한 길을 가는 원로의 곁에는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나라에 도리(桃李)의 역할을 할 원로들이 그립다. 원로가 없는 사회는 삶의 풍경이 경박해질 수밖에 없음을 사회 지도자들은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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