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 前 駐유엔 대사

70년 북한 정권의 악행을 나열하자면 그 리스트가 무척 길다.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6·25 이후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과 같은 크고 작은 군사 도발,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 858기 폭파 테러, 신상옥-최은희 부부 납치 등 19세기의 국제사회였다면 가히 전쟁 개시 사유가 충분히 될 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유엔과 국제사회가 금지하는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물론이고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 및 일본 적군파와 같은 국제 테러 집단의 지원과 배후 조종, 위폐 제작과 유통, 마약 제조와 밀매에 이르면 악당국가(rogue state)라는 국제적 명성(?)이 무색할 지경이다.

여기에 지난 13일의 말레이시아에서 저지른 김정남 독살이 새로이 추가됐다. 21세기 백주에 벌어진 테러 살인에 국제사회가 경악함은 당연하지만, 그동안 북한 정권의 잔악한 모습을 무던히도 경험해온 우리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을 조선조 초기나 중세 유럽으로 되돌려 놓은 듯한 엽기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꾸민 것이었다는 주장은 그동안 북한의 도발 때마다 들어온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상투적 수법이다.

한국과 국제사회가 생각하는 이번 사건의 성격은 한마디로 김정은의 명령에 따라 북한 공작원들이 일부 외국인을 고용해 저지른 정치적 독살 사건이다. 앞으로 나올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해줄 증거와 논리를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의 외교관이 개입됐다는 보도는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동안 아프리카, 중동, 남미, 동남아, 동유럽 등 세계 각지에 파견된 북한의 외교관들이 평양에 바치는 충성자금 확보를 위해서든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서든 주재국의 법률과 국제법을 위반한 사례가 허다하다. 1983년 아웅산 테러 때에도 현지의 북한 대사관이 깊이 연루돼 미얀마가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 사례도 있다.

사건의 중대성은 국제적으로도 심각한 파장을 예고한다. 미국은 북한의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테러 후 1988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고, 그 20년 뒤인 2008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했다. 이번 김정남 피살 이후 미국 내에서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해제보다는 재지정이 절차상 더 까다롭지만, 최근 북한의 중거리 미사일 발사 도발도 감안해 출범 한 달이 지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를 어떻게 다룰지 관심의 대상이다. 또한, 그동안 김정남에게 여러 가지 도움과 편의를 제공해 왔던 중국으로서도 매우 황당하고 화가 나는 사건이므로 그 여파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도 지켜볼 부분이다.(북한산 석탄 수입의 잠정 중단 조치는 별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입장과 대응이다. 그런데 나라의 상황은 밖으로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국가의 외교·안보적 현안의 표류가 하루빨리 정리돼야 한다. 북한과 관련해선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중장기적이고 입체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2300만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유린하면서 이번에는 이복형 독살을 지시한 김정은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안보리 결의와 국제법을 계속해서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는 북한이 과연 유엔 회원국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단장취의(斷章取義)의 무모함을 감수하며 칸트가 했던 말을 음미해 본다. “비뚤어진 성격의 인간성에서는 똑바로 된 게 만들어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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