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의 고향 집인 전북 부안의 ‘청구원(靑丘園)’. 시인은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등을 앞뜰에 심고 소박한 삶을 살며 시 창작에 몰두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97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다.
신석정의 고향 집인 전북 부안의 ‘청구원(靑丘園)’. 시인은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등을 앞뜰에 심고 소박한 삶을 살며 시 창작에 몰두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97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다.

(70) 시인 신석정의 고향, 전라북도 부안·전주


신석정이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우는 해’를 ‘소적(蘇笛)’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투고해 1924년 4월 19일자에 게재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에 불과했다. 이후 몇 편의 시를 더 발표하다가, 1930년 3월 ‘청운의 뜻을 품고’ 불교 철학을 섭렵하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할 작정으로 상경하지만, 그의 서울살이는 미처 한 해를 채우지 못한다.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전북 부안으로 귀향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가난이 가장 큰 원인이었으니, “시골로 돌아가 가난과 싸우면서라도 좀 더 인생을 건실히 살아야겠다는” 결의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수필 ‘못다 부른 목가’).

귀향한 지 3년 만에 ‘소작농에서 얻은 벼로’ 초가삼간의 집을 하나 마련해 ‘청구원(靑丘園)’이란 멋진 이름을 붙인다. 측백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이 집의 앞뜰에 시인은 자신의 취향을 좇아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철쭉, ‘시누대’(대나무의 한 종류) 등을 옮겨 심어 ‘제법 조촐한 집’을 꾸몄다. 10여 마지기밖에 안 되는 농사거리지만 가족과 함께 소박한 삶을 살며,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자족하며 시 창작에 ‘정열적으로’ 전념할 수 있었다.

6·25전쟁 이후 전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20여 년을 이 ‘청구원’에서 살았다. 시인은 고향 부안에서 보낸 이 무렵을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참다운 생활을 한 절정의 시기라고 회고한다. 무엇보다 이 집은 신석정 초기 시들의 산실이며, 첫 번째 시집 ‘촛불’(1939)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에 나오는 “은행나무와 대숲과 푸른 하늘은 모두 청구원에서 얻은 것들이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집 뒤 언덕에 오르면,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고 한다. 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얻은 시상이 바로 이 무렵 대표작의 하나인 ‘작은 짐승’에 그대로 그려진다.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난(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석정문학관(부안읍 선은리) 앞뜰에 있는 청구원은 1997년 복원한 것이다(전라북도 기념물 84호). 비록 시인의 예전 정원마저 복원할 수 없었겠지만, 주변에 여러 개의 신석정의 시비를 세워 자그마한 시비 공원을 이루고 있다. 석정문학관은 그리 큰 규모의 공간은 아니지만,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시인의 유품들을 유가족과 지인들이 잘 보전해 전달해준 덕분에 그 전시물의 질과 내용이 여느 문학관보다 알차다. 또한, 신석정과 교류가 있던 당대 여러 시인의 사진과 문집 등을 포함해, 여러 지인과 주고받은 서한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지인들의 글 속에 드러난 시인의 모습은 하나같이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다.

시인의 묘소가 있는 ‘석정공원’은 석정문학관에서 2.5㎞ 정도 떨어져 있다. 묘소로 들어가는 송정마을(부안군 행안면 역리) 초입, 담벼락에는 시인의 첫 발표작인 ‘기우는 해’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쓴 ‘가슴에 지는 낙화 소리’의 시화가 그려져 있다. 중간에 안내판이 없어 찾기가 쉽지 않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시비와 안내판을 발견하면, 바로 그 오른편으로 신석정 시인의 묘소와 또 다른 시비도 한눈에 들어온다. 그 큼지막한 시비에는 1941년에 처음 발표된 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牧歌)’에 수록된 ‘소년을 위한 목가’와 함께 신석정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새겨져 있다. 시인의 묘소와 시비 뒤편으로 늘어선 배롱나무에는 봄을 기다리던 싹눈들이 벌써 한참이나 움터 있다.

신석정이 50대 이후 생애를 보낸 전주시 남노소동의 ‘비사벌초사(比斯伐艸舍)’ 내부.
신석정이 50대 이후 생애를 보낸 전주시 남노소동의 ‘비사벌초사(比斯伐艸舍)’ 내부.

부안에서 찾아볼 신석정의 시비가 하나 더 있다. ‘파도’ 시비는 2009년에 새만금 홍보관 마당으로 옮겨와 있다. 이 시비는 원래 1991년 격포∼하서 간 국도변 해창 바닷가에 세워졌던 것이었으니,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던 신석정의 시구가 절로 떠오르던 시비였다. 하지만 그 유명하던 변산의 해창 갯벌도 새만금 간척공사로 인해 지금은 육지로 변해 이름 모를 풀만 무성하고, 이제는 ‘파도’ 소리마저 멀리 물러나서 잘 들리지 않는다.

해방 직후 ‘그동안 흩어졌던 문인들’처럼, 신석정도 서울로 향하지만, ‘너무도 숨이 막히는 해방된 서울’에서 간신히 1년을 꼬박 참고 견디다가, 또다시 귀향한다. 시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귀향이니, 그는 남은 생애 동안은 중앙 문단과 별다른 교류 없이, 고향과 그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사실, 이 무렵에 대한 시인의 기록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1951년 신석정이 부안의 청구원을 떠나 전주로 터전을 옮기게 된 것은 꼭 생활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전쟁 중 그 집안이 고통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고, 그 시인 자신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주변 사람들이 나중에 기억에 의존해 한 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무렵 신석정의 시 세계가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홀연히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시인의 삶은 가난 그 자체였다. 아끼던 청구원의 장서들을 종잇값에 내다 팔아야 했고, 시집의 판권을 쌀 두어 가마에 넘겨주어야 하는 비참함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절박함 속에서도 시 창작만큼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으니, 시인 스스로 ‘허전한 생활을 다스리면서 내일을 모색하는 안간힘’이라고 정의한, 이때의 시들은 세 번째 시집 ‘빙하(氷河)’(1956)에 수록된다.

신석정이 1954년부터 고등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으면서 차츰 생활은 안정을 찾는다. 시인이 전주로 이사한 후, 10여 년이 흐른 1961년 전주시 노송동(현재는 남노송동)에 마련한 집이 ‘비사벌초사(比斯伐艸舍)’이다. 전주의 옛 지명 ‘비사벌’에서 그 이름을 따온, 이 ‘비사벌초사’는 사실 시인의 마지막 거처이며, 그는 생의 마지막 2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신석정의 후반기 주요 작품들, 특히 시집 ‘산의 서곡(序曲)’(1967)과 ‘대바람 소리’(1970)에 수록된 시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쓰였으니, 고향인 부안의 청구원 못지않게 신석정의 시 세계에 있어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전주고등학교 근처 주택가 한가운데, 담벼락 대신 행랑채로 둘러싸인 이 예스러운 집을 겉에서만 대강 훑어보기에는,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정원을 그저 대문 너머 몰래 엿보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컸다. 다짜고짜 신석정 시인의 흔적을 찾아왔으니 정원을 좀 볼 수 있겠느냐는 참으로 무례하고 황당한 요구에도 집주인은 기꺼이 대문을 열어준다. 그러고는 흔한 일이라는 듯 고운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태산목과 후박나무 같은 수목도 설명해주고, 고맙게도 신석정의 후기 시들이 영글었던 시인의 서재도 보여준다. 지금의 주인도 예전 주인만큼이나 이 정원을 아끼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온 듯하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 원형이 무척이나 잘 보전돼 있고, 거기에 세월의 멋스러움까지 곱게 더해졌으니 참으로 그윽하다. 마당 한쪽 끝에는 신석정이 부안의 청구원에서 옮겨 심었다던 ‘시누대’도 보인다. 그 댓잎은 꽃샘의 아직은 차가운 바람결에도 마냥 푸르다.

시인의 사후 그 집안에서 이 집을 매입해 보존하자는 의견도 한때 있었으나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는 전주시에서 신석정 관련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인접한 전주 한옥마을과 연계해 이 집을 관광지로 조성하려고 한다는 ‘한참이나 때늦은’ 소식도 벌써 여러 번 들려왔지만, 그저 풍문뿐이었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집주인에게는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늘 그랬듯이, 또다시 섣부른 ‘괜한 짓’ 하지 말고, ‘비밀의 정원’처럼 당분간은 이대로 두는 것도 좋을 성싶다.

전북대학교의 삼성문화회관 앞에도 ‘산산산(山山山)’ 시비는 있지만, 여름이면 활짝 피어난 연꽃으로 유명한 전주 덕진공원을 찾아가는 편이 우선이다. 이 덕진공원에는 신석정 시인의 사후 2년 뒤인 1976년에 세운 ‘네 눈망울에서는’ 시비가 있다. 이 시비 완성 이후 다시 10년 뒤, 조각가 배형식의 작품인 등신대의 시인 동상을 덧붙여 세웠으니, 신석정 시인이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한 채, 자신의 시비에 왼팔을 얹고 있는 형상이다. 오른손에는 시가 적힌 듯한 종이를 말아 쥐고 있다. 생전 시인의 모습과 몹시도 흡사하다는 그 얼굴에는 ‘사람 좋은’ 미소가 한껏 어려 있다. 시비와 동상 뒤편에는 어김없이 마치 병풍처럼 ‘시누대’가 심겨 있다. “나에게 단 한 평의 뜰을 허락한다면 이 저 나무 다 고만두고, 한 떨기 시누대를 심어 사철을 즐기리라.”(수필 ‘정원 이야기’)

신석정 시인의 동상과 시비 주위에는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또 다른 향토 시인들인, 백양촌(白楊村) 신근, 김해강과 이철균의 시비들이 작은 광장을 삥 둘러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조선말 대 유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유허비(遺墟碑)도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는 곧 신석정의 조부와 부친의 스승인 셈이다. 다들 시인 생전의 지인들이고, 그가 시 강의를 하던 대학도 인접해 있으니, ‘사람 좋아하던’ 시인은 외롭지는 않으리라.

‘자연’과 ‘역사’는 신석정의 시를 지탱하는 두 축이며 존재 근거이다. 그는 자연과 생활을 목가적인 서정시로 노래한 전원시인이며 동시에 뚜렷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참여시인이다. 시인은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의 회귀를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자연에서 구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과 역사에서 추구함으로써, 순수와 참여라는 왜곡된 이분법적 대립을 지양하고, 순수 서정과 현실 인식이 조화롭게 공전하는 시적 공간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앞서 보여주었다. 신석정의 시 작품 속에서 풍요로운 서정 정신과 날카로운 시대 의식은 전혀 맞서지 않는다.

지난겨울 어두운 광장에 켜진 수많은 촛불을 보면서, 신석정과 그의 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시인의 1939년 간행된 처녀 시집 제목이 ‘촛불’이니 어쩌면 당연하였으리라. 그런데 문득 왜 시인은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서요”라고 노래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그 시의 나머지 부분과 내용이 영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니,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光線)들이 섭섭해합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아직은 자연의 미명이나마 희망의 빛이 남아있으니 해 질 녘의 멋진 풍경을 즐기기 위해 그리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을 얻기 위해서 아직은 촛불을 끄지 말아야 한다. 목가적인 전원시인만큼이나 또한 지조 있는 참여시인이었던 신석정이 우리네 지금 상황을 보았다면,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글·사진 =

박광수 불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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