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간 미디어들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 이를 둘러싼 환호와 탄식, 그리고 청와대를 떠나 사저로 들어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을 쏟아냈다. 이를 지켜보며 우리 사회가 앙시앵레짐을 넘어 선진화된 시민민주주의로 진전했다며 가슴 벅차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은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를 표상한다.
촛불과 태극기 시위에서 분출된 에너지는 방향성은 정반대지만 거대한 분노라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단언컨대 이러한 분노의 에너지를 단번에 잠재울 수 있는 처방은 없다. 헌재의 판결이 마법의 묘약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집권당, 야당, 과도정부 등 이른바 제도권 내의 정치 시스템들이 이 분노를 보듬어야 한다. 문제는 제도권 정치 시스템들이 제대로 작동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전국 촛불 시위 현장의 1200여 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63%의 응답자가 제도권 정치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표출하며 믿을 건 국민 자신이라고 응답했다. 태극기 시위 군중에게 물었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제도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는 이 군중은 이제 60일 이내에 새로운 정치권력을 선출해야 한다. 하지만 60일은 너무도 짧다. 박근혜 정권에 분노한 진보 성향 유권자들이나 탄핵에 분노한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후보자가 연정·통합·협치 등 이성적 화합을 외치는 후보자보다 강한 소구력(訴求力)을 지닐 것이다. 사회 분열과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 심해질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고 2017 대선을 선진화된 민주주의의 길로 이끌 희망의 한 싹이 언론에 있다고 본다. 가치 있는 정보, 정확한 팩트, 균형 잡힌 의견 전달을 통해 분노한 시민들의 이성을 일깨우고 거리의 정치에 편승하는 무책임한 정치권의 행태를 감시하는 언론 본연의 역할이 그것이다. 우리 언론은 2000년대 들어 남남갈등이 심해지고 미디어 시장 환경은 어려워지면서 진영논리와 선정주의의 늪에 빠져들었다는 질책을 받아 왔다. 과거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시민적 분노의 대립 상황에서 치러지는 이번 대선은, 우리 사회의 중심적 언론들이 이처럼 참담한 구태를 벗고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것을 엄중히 요청한다.
이를 위한 최우선의 과제가 최근 들어 시민들의 혼돈과 분노를 부추기는 가짜 뉴스와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결코 쉽지 않다. 가짜 뉴스가 조잡하다는 것은 많은 경우 오산이다. 최근 유통되는 가짜 뉴스의 정교함은 전문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러다 보니 필터 버블에 싸여 믿고 싶은 것만 수용하는 군중에게 이들이 초래할 부작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가짜 뉴스를 법규로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때 저작권법이 인터넷 콘텐츠를 퍼 나르는 모든 청소년을 범죄자로 만들 뻔했던 것처럼, 자칫 SNS로 뉴스를 주고받는 온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 우려도 있다. 가짜 뉴스의 온상인 정치권이 이 싸움을 말리러 적극 나설 리 없고, 언론 영역의 문제에 국가기관이 개입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언론과 대학 등 공공 영역이 주도하는 팩트 체킹(fact checking)이 정답이다.
이러한 공동의 노력을 통해 가짜 뉴스가 틀어막은 사회적 소통의 물길을 뚫고 그 위로 진짜 뉴스가 막힘 없이 흐를 때 2017 대선은 분노가 아니라 이성이 주도하는 진정한 민주적 이벤트가 될 것이다. 언론의 신뢰도와 위상이 제고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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