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까지 동숭동서 무대 올려
연기부터 디자인·연주도 맡아
“세상을 멸망시키는 건 미움이나 증오 같은 사소한 것들이잖아요.” “참된 인생이 없을 땐 허상으로 사는 거야. ”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삼촌’의 대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또박또박한 발음, 마디마디 매끄럽게 이어지는 시적인 문장. 약간 빠른 듯한 대사는 분명, 연극배우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에서 내공이 느껴진다. 눈을 감으니 외화 속 장면이 떠오른다. ‘얼굴 없는 배우’ 성우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매력의 무대다.
지난 16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지하연습실. 오후 7시부터 시작된 연습은 이미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프로젝트 그룹 ‘육감’으로 연극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현역 성우들이 오는 21일 개막하는 ‘바냐 삼촌’을 앞두고 처음 런스루(장면을 끊지 않고 연결해서 하는 연습)에 돌입했다. “당 떨어질 시간이네요. 뭐 좀 먹고 합시다.” 연습 동선 밖에서 조용히 모니터링을 하던 남성이 외친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를 통해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 마이클 스코필드(한국 별명 석호필)의 목소리를 맡았던 표영재 성우다. 표 성우는 이번 연극에 출연하지는 않지만 응원 차 자주 연습실을 방문하고 있다.
면면을 살펴보니 화려한 ‘목소리’들이다. 주인공 바냐는 애니메이션 ‘쿵푸팬더’의 멘티스 방성준 성우와 게임 ‘스타크래프트 2’의 짐레이너 최한 성우가 번갈아 맡는다. 각각 MBC 15기와 16기 공채 출신으로 ‘무한도전’ 성우특집을 통해 얼굴도 꽤 알려졌다. 방 성우는 “조그맣게 시작했던 연기 워크숍이 대학로 무대까지 오게 되다니 일이 너무 커진 것 같다”면서도 “연습 다음날 더빙을 하면 함께 녹음하는 다른 성우들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린다.협업이 뭔지를 일깨워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여주인공 옐레나로 무대에 오르는 한미리 성우는 EBS 22기. 대표작은 ‘스타워즈:깨어난 포스’와 ‘스타크래프트 2 모선’. “무대에 서 있는 것 자체도 힘든 것 같아요. 블로킹(동선처리) 등 실제 연극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MBC, KBS 등 공영방송과 케이블 TV 공채 성우 출신 40여 명으로 이뤄진 ‘육감’은 2014년부터 극단 서울공장과 함께 ‘음성 연기와 신체 연기 사이의 거리를 좁혀 보자’는 취지로 워크숍을 시작했고 두 번의 낭독 극과 세 번의 연극을 진행했다. 앞선 공연 ‘갈매기’ ‘리투아니아’ 등은 매진되기도 했다. 방 성우는 “팬들이 많이 온다. 성우들도 연예인 못지않게 ‘목소리 팬’을 거느리고 있는데, 골수 팬들은 전회차를 보고 가기도 한다”고 했다.
바냐 삼촌에는 스태프까지 총 17명의 성우가 참여한다. 쏘냐 역의 김자연 성우(KBS 37기)는 프로그램 북과 포스터 디자인 등을 도맡았고, 뗄레긴 역의 조민수(KBS 37기) 성우는 극 중에서 직접 기타를 치고, 이번 연극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유승화 성우는 “바냐 삼촌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다룬다. 마이크 앞에서 ‘연기 좀 한다’고 생각했던 성우들이 다른 형식을 통해 신체 ‘앙상블’을 배워 나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전했다. 공연은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름다운 극장, 26일까지.
글·사진 =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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