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에게 사실(fact)과 의견(opinion)을 분리해야 한다는 얘기는 익숙하다. 초년 시절 선배들에게 야단을 맞으며 스트레이트, 곧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기사 작성법을 배운다. 핵심은 중요한 사실들을 앞세우는 것인데, 객관성과 공정성의 바탕이 된다. 사설·칼럼 같은 의견 기사는 이런 기사 작법을 익힌 뒤에도 한참 더 지나야 쓸 기회가 주어진다.
언론중재위원회에서는 사실 보도와 의견 보도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사설이나 칼럼 같은 의견 기사는 피해 구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사실적 주장으로 피해를 보았을 때만 반론·정정 보도, 손해배상 같은 결정을 내린다. 영국 맨체스터 가디언의 편집인 C P 스콧은 ‘논평은 자유로운 것이지만 사실은 신성하다’고까지 표현했다. 의견 기사라 하더라도 사실을 전제하거나 포함하고 있을 때에는 구제 대상이 된다.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는 서울중앙지법에서 사실과 의견을 분리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 규명’이 아니라 그런 표현을 썼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김 전 실장 측 변호인은 최근 “특검이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하고 의견에 기초해 공소를 제기했다”고 주장했다. 수석비서관이 올린 블랙리스트를 결재하지 않았고 보고도 받지 않았는데, 순차로 공모했다고 하는 것은 소문과 추측 등을 믿고 불이익을 당했다는 사람들 편에서 의견을 모은 것이라는 요지였다. 보통의 법정에서는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거나 증거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한데 의견에 불과할 뿐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눈에 띄는 변론이 됐다.
특검 측은 권력의 정점인 김 전 실장이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떠세요”라고 다소 막연히 얘기했더라도 장·차관과 일선 공무원으로 내려가면서 구체화하는 법이라고 반박했다. 김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 배후라고 폭로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다음 달 6일 증인으로 나온다고 한다. 기자로서 사실과 의견은 다르다는 주장은 관전 포인트다. 물론 양쪽 다 다른 논거도 제시하고 있다. 재판부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김 전 실장은 과연 최고 법률 전문가의 면모를 다시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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