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련 기밀문서 담긴‘마오쩌둥 평전’국내 출간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은 소련의 교조적이고 폭압적인 스탈린과 대립·차별화하면서 독립적으로 중국 공산당을 이끈 사상가이자 행동가로 묘사돼왔다. 미국 등 서구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마오는 자신감이 넘치는 낭만적인 혁명가로 그려져 왔다. 옛 소련의 방대한 기밀문서를 토대로 마오가 스탈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실증적 사실을 담은 ‘마오쩌둥 평전’(민음사·사진)이 번역돼 나왔다. 특히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정략적 관계 속에서 스탈린에게 거의 조종당하는 마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에드거 스노가 1936년 마오를 만나고 저술한 ‘중국의 붉은 별’이라든지, 최근 장룽(張戎)과 존 할리데이가 쓴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 쪽의 자료에 의지해 쓴 그동안 저술들이 ‘스탈린의 순종적인 학생이자 충실한 추종자’였던 마오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심게 했고 이것이 정통관점으로 굳어졌다고 비판한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창당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크렘린으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았고, 스탈린의 통제하에 있던 코민테른(공산주의 국제연합)에 종속관계였다. 당내 권력투쟁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마오뿐 아니라 중국공산당 핵심들은 스탈린의 지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마오를 현실을 모르는 ‘동굴 마르크스주의자(Cave Marxist)’로 무시하면서도, 그의 힘이 커 갈수록 동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스탈린에 대립각을 세운 ‘티토주의자’처럼 될까 견제했다. 1949년 12월 스탈린의 70회 생일에 초청받아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했을 때 마오는 이곳에서 살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생일 만찬 이후 한 달 동안 스탈린을 만나지 못하는 푸대접을 받았다.
한국전쟁은 마오에게 스탈린의 의심과 견제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저자는 “마오의 참전 결정은 크렘린의 두목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자가 헌신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계산”이라고 평가한다. 마오 자신도 참전을 통해 ‘의심스러운 티토주의자’와 ‘친미(親美)’의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의 의심의 꼬리표를 떼어낼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스탈린의 계산은 이제 막 전쟁을 끝내고 건국한 중국공산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탈린은 미국을 끌어들여 북한·중국과 무력충돌을 통해 힘을 빼 유럽 개입을 막는 동시에 동남아의 공산화를 추진한다는, 세계 혁명의 일환으로 한국전쟁을 활용했다. 스탈린은 이를 위해 자국 대사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출석도 막았다.
당장 전후 재건이 시급한 중국공산당의 다수는 한국전쟁 참전을 반대했다. 전쟁 시작에 앞서 김일성과 스탈린이 협의를 끝냈지만, 스탈린은 19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이뤄진 회담에서 마오쩌둥에게 북한의 남침에 대해 고의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아는 마오는 분개했지만, 군사적 수단을 동원한 한반도 통일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꼭 필요했던 스탈린의 항공기 지원 약속이 없음에도 파병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쟁이 장기화하며 이미 10만 명 이상의 중국군이 전사하고 경제가 파탄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심지어 김일성마저 종전을 생각할 때조차 마오는 스탈린의 “장기전을 통해 중국 군대가 실제 전투 현장에서 현대전을 배울 기회”라는 주장에 대항하지 못했다. 결국 마오는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에야 한국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자는 “중국은 마오쩌둥이 통치하던 시절 지정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고 정치적으로 양대 초강대국과 등거리를 유지하게 됐지만, 기만과 폭력을 바탕으로 중국 인민에게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를 강요하고 그들을 피비린내 나는 사회 실험의 나락으로 몰고 간 것 역시 마오쩌둥과 그가 이끈 공산당이었다”고 평가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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