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리학에서 아킬레스건(腱)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치명적 약점을 말한다. 특히 정치인이라면 들키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결점이다. 문제는 아무리 은폐 의지가 강해도 유출을 막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이렇게 명멸해간 영웅 아킬레스는 정치사에 수없이 많았다.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지지를 받다 아킬레스건이 드러나 한순간에 몰락하는 사례를 보아온 국가지도자 상당수가 ‘아킬레스 신드롬’(Achilles Syndrome)에 시달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언젠가 밝혀져 비참한 결말을 맞는 운명을 나만큼은 피할 수 있다, 그래야 한다, 이렇게 24시간을 노심초사하고 불안해하는 증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예외를 기록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숨겨왔던 아킬레스건은 민심의 공격 한 번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박 전 대통령 아킬레스 신드롬의 시작이 뭔지는 아무도 모를 듯하나 정치인생 수십 년간 일련의 연쇄 고리가 증폭되는 과정은 유추 가능해 보인다. 측근의 배신을 목도한 뒤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 사적인 대화의 신뢰가 쌓여 국정 운영에까지 도움받았던 최순실 일가에 대한 도를 넘은 의존, 공식적으로 밝힐 수 있기는커녕 무조건 숨겨야 했던 국가 운영 방식의 비밀주의, 이에서 파생된 극소수 비선 그룹을 통한 폐쇄적인 통치술, 공식 청와대 참모들과의 진솔한 대화 외면, 나아가 국민과의 소통 단절이 확대재생산 돼온 과정이다. 이 같은 불행이 심화하는 단계마다 기저를 관통하는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선한 의지’에 대한 잘못되고 과도한 믿음이다. 내가 결단한 모든 정치적 행위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잘못일 수 없다는 절대선에의 신념이다. 그러니 국민 앞에 진솔한 사과를 표명할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반대로 억울함을 항변하면서 분노를 키웠다. 자신의 선한 의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몽매한 국민이 언젠가는 이해해 주리라 믿고, 기다리겠다는 신념이 확고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선한 신이라 믿었던 자신의 거울에 비친 모습이 악의 화신이었다는 이중성을 발견하고 놀라는 깨달음 장면이 나온다. 만사를 선악의 이분법적으로 규정하는 진리관, 박 전 대통령은 그 함정을 고민이나 해볼까. 30일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앉은 서울중앙지법 321호 법정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그래도 본질적인 숙제는 남는다. 지도자만 제대로 바꾼다고 나라를 송두리째 흔드는 폐해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대하긴 힘들다. ‘한국형 대통령제’가 갖고 있는 치명적 아킬레스건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 수난사는 한국에서 유독 심한 제왕적 대통령제와 상관관계가 높다. 대통령이 법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만족할 수 없는 이유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그동안 대통령 권한이 너무 강했으니 분권형 대통령제나 이원집정부제 등으로 통치권을 대폭 개선해 임의로 권력행사를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헌법재판소 안창호 재판관이 “미국 대통령보다 더 권력 견제 장치가 미흡하다” “이원집정부제·의원내각제 또는 책임총리제 실질화 등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며 제안한 개헌론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jup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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