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 삼층석탑

낙성대(落星垈)는 지하철 2호선 정차역으로 낯익은 지명이다. 동작구 사당동에서 관악구 봉천동 사이, 서울대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평소 유동인구가 꽤 많다. 남부순환로를 따라 동서를 잇는 길목이라 항상 차로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낙성대에 고려 시대 인헌공 강감찬(948∼1031) 장군의 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낙성대는 말 그대로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강감찬이 태어날 때 큰 별이 지는 것을 보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강감찬의 생가터인 셈이다.

원래 생가터는 현재 공원인 낙성대보다 북쪽으로 6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낙성대 공원이 정비되고 1973년부터 2년에 걸쳐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安國祠)가 이곳에 세워지면서 사실상 공원이 생가터의 역할도 겸하게 됐다.

그런데 생가터로서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게 또 있다. 역시 생가터에서 옮겨온 3층 석탑(사진)이다. 이 석탑은 거란의 침략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강감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화강암 석탑의 앞면에 ‘강감찬 낙성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출생지까지 기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3층 석탑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상륜부(탑의 꼭대기 장식)가 훼손돼 아쉬움을 준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호다.

탑의 오른쪽에는 높이 2m가량의 비석도 있다. 석탑이 사적임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1974년 세워졌다. 노산 이은상이 지은 추모글이 비석 뒷면에 빼곡히 적혀 있다. “한국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 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 한다.”

강감찬은 두 차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첫 번째는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다. 조정의 신하들은 그 위세에 짓눌려 항복할 것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적을 말로 설득해 돌려보냈다. 두 번째는 1018년이다.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끌고 재침략했을 때다. 강감찬은 최고사령관인 상원수(上元帥)로서 20만 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어 그 뒤로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궤멸시켰다. 우리가 잘 아는 ‘귀주대첩’이다.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만큼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 등에 설화가 수두룩하다. 강감찬이 젊은 나이에 원님으로 부임했을 때 그가 어리다고 얕보던 관속들을 꾸짖은 얘기는 유명하다. 그는 관속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넣어보라고 했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며 호통을 쳐 기를 꺾었다고 한다.

봄꽃이 피기 시작한 요즘, 낙성대는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비교적 넓은 공원 내를 한가롭게 거닐기 좋다. 낙성대 입구 왼쪽에 설립된 ‘강감찬 전시관’도 둘러볼 만하다. 지금은 임시로 문을 열고 있는데 19일 정식 개관한다.

글·사진=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김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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