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 김연아 기자 yun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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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훈의 미학 에세이 (1) 보다 높은 질서 - 루지치코바의 바흐 연주

하루 일을 마치고 잠들기 한두 시간 전이나 어떤 일과 일 사이 잠시 휴식이 필요할 때 나는 바흐의 건반악기 곡을 듣곤 한다. ‘평균율 클라비어’나 ‘골드베르크 변주곡’ 같은 곡도 있지만, 특히 ‘프랑스 조곡’이나 ‘영국 조곡’ 아니면 ‘파르티타’를 즐겨 듣는다. 이 곡들은 지극히 간결하고 담백하면서도 다채롭기 그지없는 선율을 들려준다. 이 곡들을 듣노라면, 어지러웠던 하루 일과나 며칠간의 복잡했던 심정이 언제 풀린 듯 모르게 흩어지면서 마음이 밝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바흐의 이런 건반 곡들을 나는 연주가를 바꿔 가며 자주 듣는다. ‘평균율’ 같은 경우에는 리히터(S. Richter)나 기제킹(W. Gieseking) 아니면 굴다(F. Gulda)의 연주를 듣고, ‘프랑스 조곡’이나 ‘파르티타’ 같은 경우에는 코롤료프(E. Koroliov)나 투렉(R. Tureck)의 연주를 좋아한다. 각각 서로 다른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그 어느 것이나 낮의 노동 뒤에 필요한 오후나 저녁의 안식을 말없이 선사해 주는 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쳄발로(하프시코드) 연주가 더해지게 됐다. 그것은 최근에 읽었던 어떤 신문 기사 덕분이다.

◇ 대학살과 바흐 음악

주자나 루지치코바(Zuzana R i kova)는 올해 90세가 된 전설적인 쳄발리스트로 저 잔혹했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음악가다. 신문 기사는 바흐의 쳄발로 음악에서 중요한 해석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그녀를, 현재 살고 있는 프라하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디 차이트 ‘Es gibt etwas Hoheres’, 2017. 2. 3)

루지치코바는 1927년 체코의 필젠(Pilsen)에서 유대인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장난감 가게를 물려받은 아버지 덕분에 그녀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루지치코바는 독일인 가정교사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고, 음악애호가였던 친할머니는 어린 그녀를 자주 오페라 극장에 데리고 다녔다. 그녀는 모든 음악에 매력을 느꼈지만, 바흐 음악에서만큼은 마치 데자뷔 같은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11세 무렵 루지치코바는 휴가 간 어느 휴양지에서 연주하다 라이프치히 토마스 합창단 음악감독의 눈에 띄지만 자신들의 아이가 ‘천재 소녀’이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녀의 부모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루지치코바는 앞세대 쳄발리스트인 란도프스카(W. Landowska)를 존경했고, 피아노 교사도 권하자 파리로 가서 학업을 이어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 때문이었다. 결국 루지치코바 가족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사하게 됐고,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피아노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모든 현실이 더 나아지길 바랐지만, 사태는 더욱더 악화됐다.

루지치코바의 아버지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죽는다. 1943년 12월 그녀와 어머니 역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가축운반열차에 실려 가던 사흘 동안 루지치코바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혹독한 갈증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흐의 ‘사라반드’-1717년에 작곡된 ‘영국 조곡’(BWV 810) 덕분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악보를 마음속으로 연주하면서 그녀는 그 시간을 견뎌 냈다. 그렇게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 루지치코바를 맞이한 것은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과 나치 친위대의 고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악보를 놓지 않았다. 루지치코바는 상부에 요청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것을 허락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많은 사람처럼 곧 가스실로 끌려갈 예정이었다. 어느 날 여러 명의 건강한 남녀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곧 선별작업이 시작됐다. 왼편은 죽음, 오른편은 삶으로 나뉘었는데, 그녀와 어머니는 오른편에 서게 됐고 이쪽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공습받은 함부르크의 시가지 청소를 떠맡게 됐다. 혹한의 날씨에도 루지치코바는 맨손으로 벽돌을 날라야 했다. 그러다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는다.

그렇게 목숨을 건졌지만 전후 시절을 살아가기란 수월치 않았다. 이전에 선생을 만났을 때, 그는 루지치코바에게 이렇게 망가진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음악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루지치코바는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연습곡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10~12시간씩 연습했고, 마침내 그간의 학업 중단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피아노에서 쳄발로로 바꾼 것은 이 무렵이었다.

◇ 어떤 것보다 높은 것

루지치코바는 스탈린 사후 더 자유로워진 분위기에서 뮌헨 콩쿠르에 참가했고 그것을 계기로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한다. 바흐 건반악기의 녹음은 이 무렵 시작된다. 그녀의 연주는 비평가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루지치코바는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도 무대에 오르는데, 그것은 착잡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지도자 (히틀러)의 건축가’로 알려진 스페어(A. Speer)가 자신의 연주를 경청했다는 끔찍스러운 사실을 한 신문에서 읽는다. 루지치코바는 이렇게 말한다. “괴테와 실러, 토마스 만과 바흐를 낳은 민족이 그렇게 동물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유럽 전체가 눈감고 있었지요. 그리고 전쟁 후에도 여전히 그랬습니다.”

루지치코바는 바흐 해석에 있어, 특히 쳄발로 해석에 있어 가장 중대한 해석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이런저런 해석보다는 예술가 자신을 중시했고, 예술가의 작품을 존중했다. 말하자면 해석보다는 악보에 충실했던 것이다. 당시까지 잘 연주되지 않거나 외면당했던 변두리 작품들을 발굴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루지치코바가 수업에서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작품의 ‘본질’이나 ‘바탕’이었다. 그녀는 ‘순수한 소리’로서의 음악에 집중했고, 이 소리가 가진 질서와 조화를 중시했다. “여기에 당신도 지금, 마치 땅 위의 작은 벌레처럼,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어떤 것도, 하나의 질서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는 당신을 위해 거기에 있으면서 인간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구원합니다.”

루지치코바는 고통과 고통 너머의 높은 질서를 보여주는 예로 ‘판타지와 푸가 903번’을 들었지만, 이것은 앞서 언급한 ‘평균율 클라비어’나 ‘바이올린 협주곡’ 혹은 ‘바이올린 소나타’ 같은 작품들에서도 느껴진다. ‘프랑스 조곡’이나 ‘영국 조곡’ 그리고 ‘파르티타’는 말할 것도 없다. 쳄발로 연주에서는 피아노 연주에서와는 조금 다른, 수정처럼 영롱하고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소박하고 정갈하면서도 끝없이 변주되는 선율들의 이어짐은 그 자체로 어떤 신적 자취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신 자신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으로 지금 여기에, 그러나 초월적 징후로 자리한다. ‘이탈리아 형식의 아리아 변주곡’쯤으로 번역될 ‘Aria variata alla maniera italiana in A minor’는 지금껏 길렐스(E. Gilels)의 연주로 즐겨 들었는데, 루지치코바의 연주도 좋다.

이 흥미로운 기사는 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사람을 이전에 어디선가 접한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였을까. 사나흘 뒤 나는 2000년대 초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 있을 때, 루지치코바의 연주를 들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독일에서 귀국한 후 나는 김우창론인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을 썼고, 그에 대한 한 신문의 서평을 읽은 최장집 선생께서 연구소에 빈방이 많으니 와서 공부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부르신 것이다. 당시 선생은 이 연구소의 소장이셨다. 이렇게 해서 머물게 된 연구소에서 6~7년 동안 내가 점심을 먹으러 갈 때면 동행하던 한 동료가 있었는데, 고전음악 애호가였던 그로부터 권해 들었던 곡의 하나가 바로 이 루지치코바와 요세프 수크(Josef Suk)가 협연한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모음곡’이었다. 여섯 개의 이 바이올린 소나타는 바흐의 가장 섬세한 실내곡일 뿐만 아니라 바흐 생존에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그 기사를 읽자마자 최근에 나온 그녀의 바흐 녹음집을 곧장 구입했다. 20개의 CD로 돼 있는데,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 루지치코바의 바흐 연주는, 마치 바흐가 그녀에게 하나의 구원이었듯이, 나에게도 작지 않은 선물이었음을 이번에 새삼스레 느낀 것이다. 그때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학회에서의 발표나 논문 쓰기를 권했고 그래서 논문 몇 편을 발표하긴 했지만, 나는 이 연구소의 구석진 2층 방에서 그보다 더 절실했던 문제인 나의 예술론에 더 골몰했기 때문이다. 김우창론과 김수영론을 거쳐 쓴 예술론인 ‘숨은 조화’는 그 무렵 출간됐다. 어쩌면 이 책들은 내 실존의 바탕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 비참을 넘어서는 일

이제나저제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간의 현실은 나치즘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때로는 시의 종말과 문명의 파국을 선언해야 할 정도로 철저히 타락하기도 한다. 루지치코바의 삶은 그런 무자비한 현실 속에서도 예술적 승화의 놀라운 예를 증명한다.

루지치코바가 연주한 LP판은 이미 1960년대 이후 수십 만장이 팔렸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전후에 편안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체코의 공산체제 치하에서 대표적인 음악가였지만 공산당 당원은 아니어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 그녀는 “2등급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루지치코바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난 ‘제3의 길’을 “아직도 찾고 있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현실의 잔혹과 저속성은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길이 있는가. 그것은 어쩌면 바흐의 음악이 히틀러의 정치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고, 더 적극적으로는 예술과 문화가 야만과 학살에 저항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노력에서 예술은 어떤 드높은 것, 고귀하고 고양된 무엇을 느끼게 한다. 이 높은 질서는 현실에 이미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가 부단히 싸우고 인내하며 찾아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 같은 현실의 비참은 다시 되풀이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삶의 드높은 질서를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현실의 비참을 견뎌낼 수 있다.

문광훈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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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미학 에세이’를 연재하는 문광훈(53) 충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2010년부터 충북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전방위적인 예술과 인문에 대한 깊은 사유작업을 해왔다. 저서로 ‘시의 희생자 김수영’ ‘김우창의 인문주의’ ‘렘브란트의 웃음’ ‘한국현대소설과 근대적 자아의식’ ‘가면병기창-발터 벤야민론’ ‘심미주의 선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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