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태생의 유대인 사상가인 해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저서에서 ‘악(惡)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집단수용소로 이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1945년 독일이 패전한 후 그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기계공으로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되고, 이스라엘로 압송돼 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아렌트는 그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50대 아저씨의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데 자못 놀란다.
아이히만은 재판 과정 내내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아렌트는 그가 저지른 일은 의도로써 자행된 ‘본질적인 악’이 아니라, ‘사유하지 않음’ 속에서 도구적 인간이 저지른 ‘평범한 악’으로 봤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악의 평범성’의 요지다. 이 견해는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것으로도 비쳐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려 한 본질은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의 가능성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3년이 지났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집약해서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다. 재난이라는 것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표이다. 재난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재난 발생 시에는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신속히 작동시키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두 가지 모두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그 이듬해(2015년 5월) 국가적 재난 사태라 할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발생했지만, 그 대응에 있어서 정부는 또다시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든 책임을 국가와 사회에 돌릴 수는 없지만, 국가가 국민을 배려하지 못할 때, 또 그렇게 비칠 때, 재난은 더 큰 재앙으로 번지게 마련이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을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구조 장비와 기술의 문제였을까? 무엇보다도 정부(대통령)의 무능력과 안이한 대처가 재난을 재앙으로 만든 근본 원인이었다. 이는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할 국가의 헌법적 책무를 저버린 행위다. 또한, 침몰해 가는 배를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허겁지겁 구명보트에 오르는 세월호 선장을 보면서 국민은 분노했다. 배를 지켜야 할 선장의 임무는 저버린 채 구조원의 손을 잡고 보트에 오른 그의 모습에서 나는 ‘악의 평범성’에 전율했다. 세월호 선장은 대한민국의 아이히만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배려해야 할 타자란 없었다.
인간에게 있어 생존의 욕망은 근원적인 것이다. 산악인 박정헌은 ‘끈: 우리는 끝내 서로를 놓지 않았다’는 책에서 후배 최강식과 에베레스트의 촐라체를 등반하고 하산하던 도중에 겪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후배 최강식이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둘은 끈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 끈은 바로 생명의 줄이었다. 끈을 자르면 자신은 살 수 있었지만, 박정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 다 죽거나 둘 다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자신의 안위보다 타자에 대한 배려였다. 어렵게 크레바스를 탈출한 두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구조된다. 이 사고로 박정헌은 산악인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손가락을 동상으로 여덟 개나 잃었고, 최강식은 손가락 아홉 개와 발가락 대부분을 잃었다.
사유하지 않고, 타자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영달만을 생각한 아이히만과 세월호 선장은 과거의 인물들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현재의 인물들이며, 무사유가 만든 ‘상징적 인물’들이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악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 가능성이 거대한 관료주의적 조직 문화와 보신적 이기주의와 결합할 때 나타나는 ‘악의 평범성’을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타자(他者)를 배려하는 것에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인양되어 목포 신항에 거치된 세월호 선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희생된 영령 앞에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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