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의 글로벌 경제 이야기 - ① 세계화, 시행착오는 있지만…
#1. 지난달 독일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나온 공동선언문에는 보호무역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 불과 반년 전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는 보호무역주의를 반대하고 공동 대응을 약속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반대했지만 보호무역주의 철폐를 선언문에 넣자고 강력히 주장한 나라도 실제로 몇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변화하는 국제사회의 기류를 단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대목이다.
지금 세계는 지난 사반세기에 걸쳐 이룬 세계화의 시계를 되돌리려는 시도가 당초 세계화를 선도했던 미국과 영국에 의해 주도되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다. 미국 국민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를 45대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영국 국민은 가입한 지 43년 만에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EU의 중심국 프랑스에서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가 프랑스 우선주의를 외치며 4월 시작하는 대선 앞에 EU 탈퇴 공약을 내걸었다. 이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뿐 아니라 어쩌면 프렉시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글로벌 경제는 1980년대 초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였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총리의 주도로 그 골격이 완성됐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민영화, 규제 완화, 자본 자유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글로벌 경제의 외연은 1990년대 초 구소련의 위성국들과 국가부도사태에 빠졌던 중남미 국가들이 ‘잃어버린 10년’을 청산하고 글로벌 경제에 합류함으로써 확장됐다. 신흥국은 당시의 조어(造語)다. 다시 20년 전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금융위기 당사국들이 경제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세계화가 일어났다.
#2. “빌리, 발레 할 때 기분이 어떠니?” “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요. 새가 된 것처럼요.” 30∼40대 영화 동호인이라면 이 대사의 장면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뮤지컬로도 공연됐던 ‘빌리 엘리엇’은 1984년 영국 북동부의 한 탄광촌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엄격한 자기규율에 관한 수많은 명구(名句)를 남겼던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다음 해 14만2000명의 광부와 그 가족들을 상대로 영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산업분규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돈벌이가 안되는 탄광의 문을 닫았다. 4년 전 철의 여인이 타계했을 때 파이낸셜 타임스는 추모와 비난의 글을 모두 실었다.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됐던 1980년대 중반부터 20여 년간 세계 경제는 물가안정 속에 오랜 호황을 누렸다. ‘자유로운 시장과 건전한 통화’에 대한 굳건한 믿음 위에서 경제정책이 수행되었고 개도국의 경제위기는 ‘시장경제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잘못 운영한 데 따른 결과’로 그 책임을 위기 당사국으로 돌렸다.
세 번에 걸쳐 퓰리처를 수상한 T 프리드먼은 세계화를 ‘황금 구속복’에 비유했다. 국가가 이 구속복을 입을 때 경제적 번영을 약속받을 수 있으나 그 대신 경제적 자주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D 로드릭은 자신의 저서 ‘세계화의 역설’에서 현재와 같은 높은 수준의 세계화는 민주주의 또는 국가 주권과 양립할 수는 있되 공존할 수는 없다고 진단했다. 황금 구속복을 입고 있을 때 정부는 시장기능을 활성화하고, 건전재정 등 안정적인 경제 여건을 조성하며, 더 많은 해외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친기업정책을 수행하는 경주를 벌이게 된다. 여기에 사회복지와 같은 구성원들의 요구, 즉 민주주의가 들어설 여지는 별로 없다.
한편 국제 규범이 마련되고 이를 준수하는 세계화라면 민주주의와 양립이 가능하다. 164개 회원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 대표적인 예다. 28개국, 5억 명으로 구성된 EU와 그 가운데서 다시 19개국이 참여하는 공동통화지역인 유로존은 또 다른 예다. 초국가적 기구가 운영하는 규범을 따를 때 이에 참여하는 나라의 정부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단체여행을 떠날 때처럼.
#3. 세계화는 중국과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수억 명이 굶주림에서 해방되고 선후진국 간 소득 격차가 줄어드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일부 신흥국들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많은 다국적 기업과 투자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그때마다 새로운 슈퍼 리치가 출현했다.
그러나 세계화가 모든 이에게 번영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글로벌 세계가 필요로 하는 자본과 노동이 아니라면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미국 평균 노동자들의 위상이 1960년대 GM 자동차에서 2000년대에는 월마트 직원으로 추락했다고 개탄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유로운 시장과 건전한 통화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깨지고 선진국의 위기도 개도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좌절감에 빠지는 계기가 됐다. 위기에 뒤이은 대침체(Great recession)에 글로벌 경제의 중심국가들은 양적완화와 같은 비통념적 통화정책과 재정 확대 그리고 자국의 산업보호조치로 대응했다. 황금 구속복을 벗어 던진 것이다. 세계 경제정책 공조의 장인 G20은 이제 유명무실하게 됐다. 자국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대외 약속을 지킬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위의 그림은 2001∼2016년 기간을 4등분하여 연평균 세계 경제성장률과 세계 교역증가율을 보여준다. 위기 전 교역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앞섰으나 위기 후 정반대의 추세가 일어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위기 전 세계 교역의 성장이 세계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그러나 위기 후 보호무역에 따른 세계 교역의 부진은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의 성장을 더 끌어내린 것이다.
세계 경제의 대침체로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는 치명상을 당했다. 우리나라 수출 증가율은 위기 후 감소세를 보이다 최근 4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수출의 국내총생산(GDP) 성장 기여도와 기여율 모두 곤두박질쳐 세계 경제 추세를 그대로 반영했다.
한편 대침체는 그동안 잠복했던 자본과 노동, 자본간, 노동간 불평등을 양산하여 불평등은 심각한 정치이슈가 됐다. 미국과 영국이 보여주었듯이 이제 민주주의는 세계화 대신 국가 주권을 선택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정부가 주도한 12개국으로 구성된 다자간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폐기, 자신의 선거 공약을 지켰다.
#4. 지난 8년간 이전투구하던 세계 경제에 마침내 완연한 봄기운이 돌고 있다. 2월 미국의 인플레율은 연방준비제도(Fed)의 목표치 2%를 넘어섰고 유로존 실업률은 위기 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달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콘퍼런스에서 한 일본 학자는 아베노믹스가 뚜렷한 결실을 거두고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우리 수출도 5개월 연속 증가세로 돌아섰다.
세계 경제가 회복될 때 글로벌 경제는 위기 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대부분 경제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전망할 것이다. 오랜 불황으로 바뀐 제도와 관행은 불황이 사라져도 쉽게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우선 국제무역은 다자간 협정에서 양자간 협정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으로 전망된다.
양자간 협정에서는 국가의 협상력이 국제규범을 대체하게 되고 무역의 이득이 분배된다. 협상력이 낮은 국가의 기업은 생산과 부품의 조달을 현지화(Glocalization)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토요타가 즉각 미국에 투자와 고용을 늘리겠다고 발표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이 가능성을 고려하면 2000년대 들어와 급증한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현지화는 이미 정체된 글로벌 공급망을 더욱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위기 후 금융안정을 위해 대형 은행을 중심으로 강화된 금융규제로 달러화 자금의 공급원으로서 글로벌 은행의 위상이 크게 위축됐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외화자금 조달 창구가 차입에서 채권시장으로 변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본 유입이 크게 감소했다. 당초 공언한 대로 트럼프정부가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을 완화하지 않는 한 이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5. 현재 민주주의와 국가 주권이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세계화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나라 경제는 국민이 어떤 정부를 선택할 것인지에 따라 그만큼 더 휘둘리게 됐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세계화가 진전되지 못한다면 글로벌 경제는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세계화는 시장을 통합하고 긴밀하게 연계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잠재력을 끌어올린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난 이듬해 어느 비공개회의에서 중국의 한 고위 경제 당국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전히 시장을 신뢰한다’고 발언했다.
불평등이 세계화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장이 불평등을 초래한다고 볼 수도 없다. 반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불평등이 혁신을 주도할 인재풀을 좁히고 따라서 성장을 잠식한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얼마든지 세계화와 양립 가능한 것이다.
글로벌 경제는 당분간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역주행할 것 같지는 않다. 세계화는 이미 깊숙이 진행됐고 글로벌 경제에 편입된 나라들은 중심국이든 주변국이든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계화는 소수 엘리트가 정치와 경제를 주도하는 시대에 일어났다. 엘리트 시대는 기존의 엘리트를 배격하는 포퓰리즘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과연 포퓰리즘은 글로벌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의문에 대한 단서는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지지하는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투표권 연령을 16세로 낮추자고 주장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일찍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 주장의 근거는 높아진 교육수준과 SNS를 이용한 정보의 접근과 공유, 소통이 쉬워졌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진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결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 글로벌 경제는 세계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국가 주권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김경수 성균관대 교수
김경수(64) 교수는 경제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학자 중 한 명이다. 현실 경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툴레인대 조교수를 거쳐 1988년부터 성균관대에서 재직하고 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한국금융학회장,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해 KDB산업은행의 개혁을 위한 KDB 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했다. 국내외 학술지에 50여 편의 거시 및 금융 분야 연구 논문을 발표했으며, 최근 ‘한국금융 70년, 그리고 넘어서’를 출간했다. 원화국제화연구회를 조직, 원화 국제화 추진을 위한 정책 연구도 수행했다.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