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저술가 이충렬 씨가 13일 문화일보를 찾아 전기문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재미 저술가 이충렬 씨가 13일 문화일보를 찾아 전기문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쓴 재미 저술가 이충렬 인터뷰

“국내엔 순수 전기문(傳記文) 작품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외국 서점엔 바이오그래피(Biography) 섹션이 많은데 우리 서점에선 홀대받고 있다. 전기는 사실성과 흡인력에서 장점이 크다. 평전보다 재미있고 팩션 소설보다 실제에 가깝다. 사람이 분류돼야 역사가 정리된다고 믿는다. 전기문학이 좀 더 활성화됐으면 한다. 제가 그 일에 일조한다면 좋겠다.”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미술사학자 최순우 등을 재조명하는 전기로 주목받은 재미(在美) 저술가 이충렬(63) 씨가 또 한 명의 숨겨진 인물을 다룬 책과 함께 돌아왔다.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김영사·사진).

백충현(1938∼2007)은 조국과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대표적 국제법 학자다. 서울대와 동대학원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을 거쳐 1976년부터 약 30년간 모교 법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당시만 해도 낯선 분야였던 국제법을 개척했다. 이뿐만 아니라 학자적 양심과 전문성으로 우리나라 외교의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5∼1998년엔 유엔 아프가니스탄 인권 특별보고관으로도 활약했다. 한국인으로서 유엔의 고위직에 진출한 것은 백 교수가 처음이었다. 그는 공부하는 학자였으나 투철한 조국애와 사명감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 씨는 “22세에 미국에 이민 가 살면서 국가 외교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외교력이 발전해야 국익이 커지고 국민의 삶도 향상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백 교수는 재일동포, 위안부 문제, 문화재 반환 청구 등에서 풍부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대응논리를 제시했다. 훌륭한 학자를 발굴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번 글을 썼다”고 설명했다.

이 씨가 반했던 백 교수의 활약상을 몇 가지 살펴보자.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수교국이 아니었다. 중국을 ‘중공(中共)’이라 불렀다. 중공 국적의 민항기 1대가 강원 춘천 미군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납치범들이 대만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한국으로선 난감했다. 이때 외교부가 긴급 자문한 사람이 백 교수였다. 백 교수는 “납치범의 정치적 망명을 부인해도 안 되고, 하이재킹이라는 범죄 사실이 무시돼도 안 된다. 헤이그 협약대로 ‘국내 재판 관할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명쾌한 해법을 내놨다. 납치 사건은 백 교수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갔고, 한국과 중국은 이를 계기로 가까워져 1992년 수교했다.

1991년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는 조선 왕실의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요청이 이뤄졌다. 외규장각 의궤는 구한말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가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문화재다. 백 교수는 “외규장각 의궤가 약탈 문화재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기록이 프랑스 측에도 남아 있으므로 명백하다. ‘전시국제법’에 의해 반환 요청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프랑스는 2년 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 선정 문제로 방한했을 때 의궤 297권 중 1권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나머지 반환을 미루다가 지난 2011년에야 ‘임대’ 조건부로 돌려줬다.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서도 백 교수는 ‘실효적 지배’라는 사실에 근거해 차근차근 대응논리를 구축해왔다. 또 1997년엔 독도가 일본 영역으로 표시되지 않은 ‘관판일본실측지도(官板實測日本地圖)’를 사비 1억 원을 들여 구매, 자료를 확보했다.

이 씨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외교 통상 경쟁이 치열해지는 요즘, 국익을 위해 헌신했던 백 교수의 삶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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