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뇌물 채용 ‘부패 산더미’
규제만 늘어 경제활력 떨어져
구제금융 이후 공공지출 줄자
청년 실업률 53%까지 치솟아
폐업상점 늘고 활기잃은 거리
수출기반 없는데 내수도 붕괴
‘세상의 모든 정부 활동을 반대한다.’
지난 1일 찾은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 한 벽면 가득 이런 낙서가 쓰여 있었다. 아테네 시내 곳곳에서 문 닫은 상점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상점의 셔터나 유리창, 건물 벽면에 새겨진 반정부적 메시지를 담은 낙서와 그라피티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구제금융 8년 차에 접어드는 그리스 사회에 민간 경제의 활기가 없어지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근에서 만난 우버 택시 기사 유르젠 알렉산드로스(28) 씨는 “대학 졸업 후 기술직 공무원 채용이 늘어나길 기대하면서 다른 취업 준비는 하지 않았다”며 “4년 넘게 아무 일도 하지 못하다가 올해 초부터 우버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의 월수입은 약 700유로 안팎인데 각종 세금, 월세 등을 내고 나면 겨우 200유로 정도를 쓸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일을 한다는 자체가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상업·기업가협회(ESEE)에 따르면 청년 채용의 상당 부분을 공공 일자리를 통해 해결했던 그리스는 채권단의 요구에 따라 공공지출을 줄였다. 이에 따라 현재 청년 실업률이 53%에 육박한 상태다.
1980년대 이전 그리스의 공무원 규모는 30만 명 수준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집권 사회당이 주변 세력을 공무원으로 만들기 위해 원칙 없는 채용을 하면서 공무원 문제가 촉발됐고, 이후 정권교체 시마다 공무원 숫자가 늘어났다. 더욱이 법적 절차에 따라 공무원을 선발한 게 아니라 혈연, 인맥, 뇌물 등에 의해 마구잡이 채용을 했다. 민간 싱크탱크인 그리스경제산업연구소(IOBE)에 따르면 공무원 규모는 2010년 95만 명까지 치솟았다. 1000만여 명의 인구 중 10분의 1 가까이가 공직에 있다는 의미다. 현재 공무원 규모는 67만 명까지 줄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여전히 인구수 대비 과잉이다.
마구잡이 채용을 하다 보니 공무원들의 자질과 전문성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공무원 태만으로 인해 정책 집행이 수년간 늦춰지는 게 다반사다. 심지어 총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경찰도 있을 정도다. 공무원 부패도 심화됐다. 예를 들어 외국 약품 도입 시 뒷돈 거래가 이뤄지면서 수입 의약품의 가격이 크게 부풀려지는 식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활약하는 등 20년간 스포츠지 기자생활을 해 온 미할리스 푼두키디스(50) 씨는 지난 2008년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국영방송 ERT 공무원 계약직으로 이직했지만 2010년 긴축이 시작되면서 해고당했다. 지난 2015년 시리자 집권으로 ERT가 다시 문을 열고 기존 인력들이 재채용됐으나 푼두키디스는 ‘빽’이 없어 돌아가지 못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취업 시 공정성이 크게 훼손돼 혈연, 인맥, 돈 등을 활용하지 않으면 취업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채권단의 요구에 따라 공공지출을 삭감하고 있으나 체계적인 계획이 없는 상태다. 미첼리스 바실리아디스 IOBE 연구원은 “일부 부처는 과잉이 지속되고 오히려 꼭 필요한 분야의 공무원이 줄어드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면서“특히 국립병원의 의사 등 의료진이 대거 줄어들면서 의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의 체질 개선이나 민영화도 속도가 느리다. 바실리아디스 연구원은 “현 정권은 부동산에 갑자기 유적 보호지를 지정하는 등 민영화 지연정책을 펴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토리니 등 지역 공항 14개 운영권 매각은 4년 만에 겨우 마무리됐다.
공공부문의 방만함, 부패가 이렇듯 심각하다 보니 채권단의 개혁 요구가 공공부문에 집중되고 있다. 더욱이 공공부문의 태만은 민간부문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바실리아디스 연구원은 “그나마 관광업이 증가하고 있는데 대규모 호텔을 짓기 위한 토지 및 건설 허가 등에 있어서 규제가 많아 관련 경제가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 30일에 찾은 미트로폴리스 거리에도 많은 상점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한때 서울 명동처럼 활기가 넘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거리에 위치한 ESEE의 카라람포스 아라초바스 연구원은 “중심가 상점 3분의 1이 문을 닫았다”며 “바로 앞 건물의 상점들은 문을 닫은 지 너무 오래돼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이고 저녁때는 마약 중독자들이 배회해 분위기가 더 좋지 않다”고 말했다.
수출 산업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내수 붕괴는 청년 고용 절벽을 야기하고 있다. 부가가치세를 13%대에서 24%대로 인상하는 등 각종 세금을 인상해 재정수입을 늘리는 방식 탓에 기업활동은 더 위축된다. 아테네 현지에 진출한 국내업계 관계자는 “경제위기에 따라 그리스의 거의 유일한 대기업인 해운사들이 자발적으로 사회공헌을 늘리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부가 선원 고용에 대한 세금을 올리면서 선원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상황”이라며 “단순 아르바이트 등을 빼면 실질 청년 실업률은 80%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테네=글·사진 유현진 기자 cworang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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