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규 서울시립대 교수, 한국장애인재단 이사장

4월 20일은 봄꽃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온 장애인의 날이었다. 정부와 지자체, 복지시설 및 장애인단체 등에서는 각종 행사와 이벤트로 무척 바쁘게 이날 하루를 보냈다. 장애인의 날을 아예 없애자는 사회 일각의 목소리도 있지만, 어린이날(5월 5일)과 노인의 날(10월 2일)이 있듯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과거보다 장애인에 대한 복지 정책과 사회적 환경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장애인의 삶의 질을 담보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 시혜적 복지가 아닌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은 아직 촘촘하지 못하고 사회적 제약과 장애인을 서비스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하다. 복지관, 시설 등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취미·여가·문화·교육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공급자 중심의 획일화된 프로그램은 수요자인 장애인 개개인의 욕구와 만족을 충족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장애인 복지는 치료와 재활을 중심으로 생물학적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자립에 대한 지원과 사회적 제한을 제거하는 패러다임으로 변화해 왔고,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에는 개별화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권리 보장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다.

런던 유학 시절에 읽었던 한 논문(1993년)에서 제니 모리스라는 영국의 장애인 운동가이자 저술가가 ‘현금을 장애인 당사자에게 직접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덧 영국에서는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산정해 현금으로 지급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개인이 선택해 원하는 서비스를 구매하는 개인예산 제도가 시작됐다. 1996년 지역사회돌봄법(서비스 현금지급 제도)이 제정, 1997년 4월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장애인 당사자가 서비스의 선택권과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복지의 근본을 재구조화한 것이라 평가될 만큼 파격적이고, 영연방 국가들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 확대 적용되고 있다.

우리도 생애주기별, 개인별 맞춤형 복지를 주창해 왔으나, 아직 체감도 높은 개별화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장애를 여섯 등급으로 구분하는 장애등급제와도 연관이 있는데, 관리의 편의를 위해 복지 서비스 수요자를 구분해 서비스를 공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정한 사람을 위해 맞춘 것이 아닌, 일정한 치수에 따라 미리 여러 벌을 지어 놓고 판매하는 기성복처럼 말이다.

복지 서비스가 장애의 정도가 아닌 개개인의 욕구를 중심으로 판정하고, 장애인 본인이 서비스를 선택, 구매할 수 있는 당사자 중심 복지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는 신체적 조건만이 아닌 사회적 욕구나 환경 등을 종합해 서비스 총량을 정해야 하고, 서비스 전달 체계도 중복과 누락이 없도록 재정비가 선행돼야 한다. 현재의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 제공 시스템이 수요자 중심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단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장애계, 민간 영역과 함께 논의와 연구, 토론을 통해 한국형 개인예산 제도의 도입을 깊이 있게 검토할 때인 것이다.

장애인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접근할 기회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장애인 개개인이 필요한 서비스를 직접 선택하고 통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호주,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지에서 각국의 사정에 맞춰 시행하는 개인예산 제도는 장기적으로 예산을 절감하여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이 돌아가는 체감도 높은 제도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도 이제 기성복 복지가 아닌 한국식 ‘양복점 복지’를 실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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