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 톰프슨이 지난 3일 LPGA투어 ANA인스피레이션 4라운드에서 벌타 사실을 통보받은 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다.
렉시 톰프슨이 지난 3일 LPGA투어 ANA인스피레이션 4라운드에서 벌타 사실을 통보받은 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다.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위반 행위’만 처벌 가능
합리적 플레이뒤 실수 나와도 비디오판독 제한

선수들 반발에 곧바로 시행키로
비디오 관련 규정 등 문제조항
2019년 때까지 보류 ‘땜질식’
복잡한 규칙에 위반 선수 많지만
양심에 따라 플레이 더 중요해져


세계 골프 규칙을 규정해온 양대 기구 영국왕실골프협회(R&A)와 미국골프협회(USGA)가 선수들의 등쌀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R&A와 USGA는 26일 오전(한국시간) 최근 논란이 된 ‘렉시 룰’과 관련, ‘육안으로는 합리적으로 볼 수 없는’ 위반 행위에 대해 처벌을 제한하는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또 선수가 룰에 근거해 합리적인 판단 기준에 따라 신속하게 이행했을 때 비디오 판독이 제한된다. 예를 들어 볼이 해저드에 빠졌을 때 어느 장소에서 드롭을 하느냐, 마크를 한 뒤 볼을 어디에 내려놓느냐 등에 관한 규정이다. 선수가 룰에 따라 합리적으로 플레이했다면 나중에 비디오 판독 등을 통해 실수가 밝혀지더라도 정당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조항이 바로 ‘렉시 방지법’에 해당한다.

문제가 된 렉시 톰프슨의 볼 마크 장면. 위 사진부터 볼을 마크한 다음, 볼을 집어 올린 후 원래의 볼 마크 지점보다 볼을 홀 쪽으로 내려놓은 뒤 마크를 들어 올리고 있다.
문제가 된 렉시 톰프슨의 볼 마크 장면. 위 사진부터 볼을 마크한 다음, 볼을 집어 올린 후 원래의 볼 마크 지점보다 볼을 홀 쪽으로 내려놓은 뒤 마크를 들어 올리고 있다.

새 규정은 골프 규칙 재정(裁定)에 ‘34-3/10’ 조항을 신설해 즉시 시행하기로 했다. R&A는 새 규칙에 대해 정교한 카메라가 감지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눈이 합리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판정 기준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것만 인정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R&A는 그러나 비디오 관련 규정을 비롯해 전화나 이메일 및 소셜미디어와 같이 외부 제보를 처리하는 방법, 스코어 카드 제출 후 처벌 적용 등은 검토한 뒤 현재 진행 중인 2019년 규칙 개정 때까지 시행 여부를 보류했다.

이에 따라 지난 3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인 ANA인스피레이션에서 렉시 톰프슨(미국)이 시청자 제보로 벌타를 받는 상황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R&A와 USGA가 이번에 마련한 이른바 ‘렉시 방지법’은 톰프슨의 벌타 사건이 발생한 뒤 ‘여론’이 들끓자 한 달도 안 돼 마련한 ‘땜질 식’ 처방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렉시 방지법과 관련해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테니스, 야구, 배구, 축구 등에서 비디오 판독을 도입하는 추세와는 동떨어진 결정이라는 비난이 있다.

반면 선수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거나 자신도 모르게 한 실수, 심각한 규정 위반이 아닌데도 TV 화면에서 잡아낸 장면을 근거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선수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이유는 경기위원이 아닌 팬, TV 시청자가 전화로 경기에 개입해 결과를 뒤바꾸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유명 스타들은 카메라가 시종 따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기에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골프는 600년의 역사를 지닌 스포츠며 규칙의 틀이 만들어진 것은 300여 년 전이다. 1744년 R&A의 전신인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 동호회와 에든버러 골퍼 동호회의 정례 대결을 앞두고 ‘13개 조항’이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진적으로 확대, 개정돼 왔다. 규칙이 없던 시절에는 고성과 삿대질이 난무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최초의 클럽 대항전에서 임시로 규칙을 마련했다. 당시 골프 규칙을 만든 군사재판관 토머스 키치 대령은 “…골퍼 중 악인이 없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골프는 자신의 플레이를 스스로 심판하는 경기이므로 각자의 양심을 믿고, 골프 규칙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초창기 규칙에는 ‘벌’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단순히 어떻게 한다는 정도의 조항을 나열했을 뿐이다. 골프 규칙 첫째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행동하지 않고, 둘째가 볼은 있는 그대로 플레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정집’이 500페이지가 넘고 판례가 1200여 가지로 늘어나는 등 복잡해졌다. 선수조차 규칙을 몰라 위반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들키지 않는 규칙 위반’ 유혹을 뿌리치긴 쉽지 않다.

규칙은 수없이 더해지고 수정됐지만 높은 수준의 행동 규범, 특히 플레이어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선수 스스로 규정을 준수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덕목이 골프의 가장 큰 매력이기 때문이다. 4대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며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보비 존스(미국)는 1925년 US오픈에서 양심 고백을 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1타 차 선두로 우승을 눈앞에 둔 존스는 러프에서 어드레스를 하는 사이 볼이 움직이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지만 경기위원회에 자진 신고해 1벌타를 받았다. 이 때문에 공동 1위를 허용하고 연장전에 들어가 우승컵을 내줬다. 존스는 “내가 은행 강도를 하지 않았다고 나를 칭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해 그의 행동을 칭찬하는 이들을 머쓱하게 했다.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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