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약소국 패러다임 벗고
高부가가치·高위험 연구를
차기정부‘도약-추락’기로
민간중심 혁신생태계 구축
‘하향식 컨트롤타워’론 안돼
대선후보 TV토론에서 ‘4차 산업혁명’은 주요한 화두 중 하나이다. 4차 산업혁명이 레토릭에 불과하고 정부 차원에서 목청 높일 용어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지만, 최소한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정보통신기술 기반 사이버스페이스-물리세계의 융합이나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의 등장을 적절히 정리한 현상적 경향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유력 후보들이 4차 산업혁명 대응 공약들을 내놓고 있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잘 준비된 후보가 없다. 익숙한 접근과 뻔한 정책수단, 그리고 연구현장의 오랜 민원들을 나열하고 4차 산업혁명으로 수식한 데에 그친다.
차기 정부는 과학기술혁신·산업 분야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블룸버그는 지난 1월 주요국들에 대한 혁신지수평가에서 한국을 4년 연속 1위로 발표했다. 이에 대한 국내 반응은 불편하다는 것이다. ‘샌드위치 위기’를 강조하면서 ‘못한다, 부족하다’고 주장해야 연구개발에 대한 사회적 투입과 정부지출 확대를 계속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혁신역량은 투입 요소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 사실이지만, 요인이 어떻든 한국은 과학기술혁신 강국이며 최상위권 산업국가이다. 제조업 포트폴리오를 보면 전자,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조선, 섬유, 철강이 모두 규모가 크고 경쟁력이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지출은 세계 1위이며, 전체 연구개발투자 규모(구매력 환산)는 미, 중, 일, 독에 이어 세계 5위이다.
산업 일선과 연구현장에서는 힘들다는 얘기뿐인데 웬 탁상공론이냐는 비판이 분명 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못합니까?’라고 되물으면 답할 말이 변변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프다, 오를 곳이 많아 위만 본다”는 인식이라면 나쁘지 않다. 그것이 한국의 동력이다. 하지만 정부는 상황을 냉철하게 봐야 한다. 과거 개발도상국, 과학기술약소국 시절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자는 것이었고, 성공했다. 추격국가로서 답이 있는 문제를 풀고 남이 먼저 간 길을 빨리 쫓아가는 데에 주효한 전략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과거와 달라졌다. 차기 정부는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기술약소국 패러다임을 탈피하고 추격형 전략을 버려야 한다. 과학기술혁신 선도국의 일원으로서 한국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거나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도전성이 큰 고부가가치-고위험(high risk) 연구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다. 무엇이 확실한 선택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정부나 민간이나 마찬가지이다. 정부가 ‘신성장동력’이나 ‘전략신기술’을 지정하는 것, 인위적인 맞춤형 인력을 대량 양성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대신 민간에서 도전적 연구개발, 새로운 시도, 야심찬 창업, 신산업 개발을 할 수 있도록 리스크를 분담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하향식 ‘과학기술혁신 컨트롤타워’는 필요 없다. 대신 기초연구부터 산업현장까지 촘촘히 연결된 혁신 네트워크를 고도화, 활성화하는 촉진자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정부는 혁신생태계의 코디네이터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의 비관과는 달리 한국이 4차 산업혁명 선도국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해외 전문가가 많다. 차기 정부는 도약의 기회와 추락의 위기를 동시에 맞는다. 하지만 웬만한 선진국들보다 유리한 출발선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순진하고 구태의연한 정책으로 이 절호의 기회를 무산시켜선 안 된다.
후보별 공약을 평가하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익숙한 내용을 발표했다. 민관협력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정부개입을 최소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민간주도를 외치고 과학기술을 중심에 놓으면서 인재 10만 양성론을 주장하는 것은 어색하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과학기술혁신·산업에 대한 통합적 접근이 돋보이지만 구체적인 정책은 적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진보 후보답게 환경과 연구현장을 강조하지만 정부 지원 부분은 타 후보들과 차별화되지 않는다.
박상욱 숭실대 행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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